지난 1992년 11월 서울 신림동의 한 여관에서 술집 여종업원이 살해되었다. 유력한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그 전날 여관에 함께 투숙한 김모 순경. 그는 “아침 7시경 여관에서 나왔다가 10시경 돌아가 보니 피해자가 살해돼 있었다”고 주장하며 범행을 부인했다. 그러다가 “여러 정황으로 볼 때 혐의를 벗기 어려우니 자백을 하고 가벼운 처벌을 받으라”는 동료 경찰관의 설득에 못 이겨, 범행을 시인했다. 그는 살인범으로 인정돼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대법원에 상고했는데, 그 무렵 진범이 잡히는 바람에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이처럼 형이 집행되기 전에 진범이 잡히는 경우는 매우 운이 좋은 경우다.
청소부 배모씨는 고등학교 숙직실에 침입해 강도살인을 한 혐의로 지난 1974년 5월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사형이 집행된 후 붙잡힌 공범에 의해 뒤늦게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배씨는 공범과 함께 고등학교에 따라 들어가 운동장 벤치에서 술을 마시다 잠들었고, 숙직실에 침입해 피해자를 살해한 사람은 공범이었던 것이다.
최근 이 지역의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국민참여재판 사건 등에서 잇따라 무죄가 선고된 것을 놓고 일부 우려하는 견해가 있다고 한다.
범죄자를 처벌하지 못하는 사회는 부패하고 타락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와 같은 지적은 경청할만하다. 그러나 앞의 오판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범죄혐의를 인정해 유죄로 처벌하는 것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할 문제이다. 피고인이 일시 범행을 자백한 사건에서도 오판이 없지 않은데, 시종일관 범행을 부인하는 피고인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형사재판에서의 무죄는 유죄(guilty)가 아닌 것(not guilty)을 말할 뿐,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것(innocent)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무죄 판단은 확률상 어느 쪽의 가능성이 더 높은가에 따라 결정할 수는 없고, 피고인이 범인이라는 확신이 들 때에만 유죄를 선고하고 그러한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무죄를 선고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헌법이 보장한 무죄 추정의 정신이기도 하다.
1957년에 만들어진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은 무죄의 결론에 이르는 ‘합리적인 의심(reasonable doubt)’의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버지로부터 학대받던 소년이 아버지를 죽인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유죄가 인정되면 사형이 불가피하다.
증거가 명백하므로 당장 유죄를 선고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배심원들이 토론 과정에서 그 증거들에 대해 하나 둘 의심을 품게 되고, 결국 처음에 유죄 11명, 무죄 1명으로 시작된 배심원의 표결은 유죄를 주장하던 배심원들이 ‘나도 이제 합리적인 의심이 들어(I have a reasonable doubt now)’라고 고백하면서 마침내 만장일치 무죄로 결론을 맺는다.
재판은 권리구제의 마지막 절차이다. 재판이 당사자의 억울함을 해소해 주지 못한다면, 이성에 기초한 분쟁해결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범죄혐의를 인정해 피고인을 처벌하기 위하여는 ‘유죄의 확신’이 필요하고, 피고인을 유죄로 인정하는데 ‘합리적인 의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인규 광주지방법원 판사·공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