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고사를 알고 있다. 그런데 만약에 맹자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판사가 되었더라면, 그래도 성선설을 주장했을까?
예전에 어느 후배 판사로부터 “판사로 근무한 지 6개월 만에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성악설이 맞는 것 같다”는 말을 들고 문득 해본 생각이다.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에 대해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천 년 전부터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적어도 법률가 중에는 성악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해가 안되는 바도 아니다. 형사재판을 맡게 되면 매일같이 대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과 피해를 준 범죄자들이요, 그런 범죄자들이 법정에서 이른바 피고인의 인권을 내세우며 자기변명에 급급한 모습을 보면 그 뻔뻔스러운 태도에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민사재판이나 가사재판을 맡는다고 해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분명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함께 사업도 하였을 텐데, 소송이 제기되면 원고건 피고건 재산적 이익에 눈이 어두워 한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 자기가 옳다고 다투고, 신성한 법정에서 거짓말과 위증을 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 10년 이상 살을 맞대고 살아온 부부가 이혼소송에서 재산이나 위자료를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자식들도 내팽개치고 상대방이나 상대방 집안까지 싸잡아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다투는 모습을 보면, 과연 저들에게도 예전에 사랑으로 평생을 함께 하자고 다짐하던 때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런 사건, 그런 재판을 하다 보면 점차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고 당사자나 증인의 말이라도 그를 뒷받침하는 물적 증거가 없으면 일단 의심부터 하는 버릇이 들게 된다. 나아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도 법이 없다면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홉즈의 분석에 공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굳이 “죄를 미워하되 인간을 미워하지 말라”는 법언을 들지 않더라도 판사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인간에 대한 사랑에 있음은 틀림없는 것 같다. 필자 역시 판사로 임관된 초기에는 왜 그렇게 범죄자들이 나쁘게만 보이던지, 어떻게 죄를 짓고도 저렇게 뻔뻔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무조건 엄벌하려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다행히 필자는 좋은 선배 판사들을 만나 그분들로부터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배울 수 있었다.
그분들은 필자에게 법정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쫓기고 절박한 상태에 있으므로 판사는 언제나 자신에게 재판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울어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쳐주었다. 그분들 덕분에 처음에 범죄사실밖에 보이지 않던 필자가 이제는 피고인의 성장환경과 가족관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처와 어린 자식들을 둔 피고인에게 실형을 선고해야 할 때면 몇 번씩 기록을 들추면서 고민을 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좋은 변화인지 아니면 이제는 필자도 세월이 흘러서 그냥 물러터진 판사가 되고 만 것인지.
유난히도 사람이 그리운 가을이 되면 필자를 이렇게 만들어 주신 그분들을 찾아뵙고 한번쯤 응석을 부리고 싶어진다.

/김하늘 광주지방법원 부장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