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중부지방에서 혼자 사는 할머니가 성폭행당한 후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다. 범행 현장에서 수집할 수 있었던 증거는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전자 감식 결과뿐이었다.
그러나 유전자 관리시스템(이하 유전자 정보 은행)이 없었기 때문에 유전자 감식 결과만으로는 그것이 누구의 유전자인지를 알 수 없어 수사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15년의 공소시효(일정한 기간의 경과로 형벌권이 소멸하는 제도로서 현재는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살인의 공소시효는 25년임)가 완성될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공소시효가 완성되기 3개월 전에 그 유전자가 누구의 것인지 밝혀졌고, 경찰 수사팀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 공소시효 완성 전에 산에서 은둔중인 범인을 검거하게 되었다.
만약 유전자 정보은행이 갖추어져 있었다면 사건 발생 후 바로 범인을 검거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그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살인범을 처벌할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될 뻔한 사건이었다.
현재 방영 중인 미국 드라마 ‘CSI 시리즈’ 또는 언론에서 보도되었던 ‘서래마을 영아유기 살해사건’ 등 엽기적 강력사건을 접하면서 우리는 유전자 감식이라는 전문적인 용어를 자주 보고 듣게 되었다.
오늘날 유전자 감식은 법 과학의 한 분야로서 살인 등 각종 사건을 해결하는 중요한 증거로 사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삼풍백화점 붕괴참사, 대구 지하철 화재참사, 미국 9·11 테러 사건 등 희생자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경우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유전자 감식 결과의 높은 변별력과 신뢰성으로 인해 외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이를 관리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미국의 경우 모든 주에서 중대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로부터 강제적으로 유전자 정보를 채취해 보관할 수 있는 법률이 있고, 영국이나 캐나다 등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국가적인 유전자 정보은행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유전자 정보를 통해 범인이 특정되기도 하지만, 범죄 혐의에서 벗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유전자정보는 이제 수사에서 그 중요성이 증대되고 있다. 범죄 용의자의 범죄 관련성 여부를 수사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과 시간이 실로 막대하다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유전자정보은행의 효율성, 경제성은 매우 높다고 할 것이다.
유전자 감식의 정확성과 유전자 정보은행의 높은 효율성에도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는 2006년 ‘유전자 감식정보의 수집 및 관리에 관한 법률안’이 제출되었으나, 인권 및 개인정보 보호라는 역작용에 대한 우려로 인해 2008년 5월경 국회회기 만료로 폐기되어 법률화되지 못하고 말았다.
올해부터 국민참여재판제도가 법적으로 도입되어 시행되는 등 미래의 사법환경은 더욱더 공판 중심으로 변화할 것이고 그에 따라 객관적, 과학적 증거에 대한 의존도는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너무 늦기 전에 전문가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이 유전자정보은행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고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법률화, 제도화되기를 바란다.

/강성기 광주지방검찰청 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