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때 일이다. 한 수녀가 나치군의 공격에 부상당한 연합군 군사를 차 안에 숨겨 국경을 통과하던 중 독일군의 검문을 받게 되었다.

독일 병사가 물었다. “차 안에 유태인이나 연합군을 숨기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수녀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거짓말을 하는 것은 교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녀는 이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지요” 그러자 독일 병사도 웃음을 지으며 수녀가 탄 차를 통과시켜주었다.

필자가 “수녀는 거짓말을 하였다”라고 평하면 혹자는 수녀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고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말의 의도나 결과 면에서 보면 수녀는 거짓말을 한 셈이다.

수녀는 독일 병사가 차 안에 아무도 숨기고 있지 않다고 믿고 통과시켜 주기를 바라면서 위와 같은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 독일 병사는 차 안에 연합군이나 유태인은 없다고 믿었다. 결국, 수녀는 통쾌하게 독일병사를 속인 것이다. 지혜로운 수녀의 재치 있는 거짓말에 ‘탁’하고 절로 무릎을 치게 된다.

만일 이야기의 무대를 수사기관이나 법정으로 옮겨보면 어떨까? 갑은 친구와 주점에서 맥주를 마시던 중 취객과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취객이 욕설을 하며 소란을 피우자 화가 난 친구가 주먹을 날려 취객과 몸싸움이 벌어졌고 결국 경찰서까지 가게 되었다.

친구와 함께 경찰서에 동행한 갑은 사건 현장을 목격하였다는 이유로 참고인 조사를 받게 되었다. 갑은 경찰관에게 자초지종을 말하였다. 사건이 검찰에 송치되자 주임 검사는 ‘쌍방 폭행’이라고 판단하였고 두 사람 모두를 폭행죄로 기소하였다.

피고인 자격으로 법정에 선 친구는 공소사실을 극렬히 부인하며 갑을 증인으로 신청하였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증언해 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받은 갑은 먼저 시비를 건 취객이 괘씸하기도 하고 시비에 휘말린 친구의 처지가 안타깝기도 한마음에 “취객이 먼저 주먹을 휘둘러 친구는 이를 피하기만 하였는데, 취객이 스스로 넘어져 다쳤다.”라고 증언하였다.

그리고 경찰 조사에서는 주취 상태에서 조사받느라 잘못 이야기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양 당사자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다른 목격자가 없는 상황에서 결국 재판부는 갑의 증언을 바탕으로 친구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전쟁 당시 귀중한 생명을 구한 수녀의 ‘하얀’ 거짓말과 친구에게 불리한 재판 결과를 막을 요량으로 위증을 한 갑의 ‘새빨간’ 거짓말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비록 갑은 우정을 지켰으나, 진실은 가려졌고 취객은 억울하게 되었다.

사실관계를 밝혀 범인을 처벌하는 책무는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에 있음에도 갑의 증언이 거짓이니 신빙성이 없다고 탄핵하지 못한 검사와 위증을 믿은 재판장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는 갑의 경우와 같이 ‘새빨간’ 거짓말에 의하여 진실이 묻히고 사실이 왜곡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새로운 수사를 통해 법정 위증을 단죄함으로써 사실왜곡을 바로 잡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후적 구제이므로 사실왜곡을 예방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갑의 최초 진술 및 진술 번복 경위에 대한 상식에 부합하는 평가를 통해 진실을 밝히는 것이 진실왜곡을 예방하는 데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또 이 같은 법조인의 부단한 노력에 더하여, 국민들 역시 법치국가의 주인으로서 진실발견을 방해하지 않을 성숙한 법치의식이 필요한 대목이다.

/이주훈 광주지방검찰청 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