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어느 수업시간에 받은 팜플렛 한구석에 있던 책 이름이 있었다. 나는 그 책 이름을 한번 유심히 보고서, ‘서구의 몰락’이라는 제목이 꽤 선정적이라고 생각하였다. 당시 슈펭글러의 사상을 한번 공부한 후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반드시 이 책을 꼭 읽으리라 다짐을 하였으나, 그것은 요원하여서 이십년이 지난 이제야 이 방대한 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이 책은 제1차 세계대전의 끝자락인 1918년 발간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있기 이전의 세계는 유럽인들에게는 가히 안정의 황금시대였다. 그 시대는 모든 것이 ‘지속’ 위에 세워져 있는 것처럼 보였고, 국가가 이 지속의 최고 보증인이었다.

화폐는 대부분 금화로서 변동 없이 유통되었고 누구나 자기는 얼마만큼 소유하고 있으며 수입이 얼마나 들어올 것인지 알고 있었다. 또 재산을 가지고 있는 자는 거기에서 얼마의 자산소득을 올릴 수 있는지 정확히 계산할 수 있었으며, 관리나 장교는 자기가 정확하게 언제 승진을 하게 되며 어느 해에 정년 퇴직하게 될 것인지를 안심하고 달력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안정이 지속되리라는 생각에 전쟁과 혁명을 믿지 않았고, 그런 과격한 것은 이성의 시대에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전쟁과 기근이 있었던 이전의 세계를 경멸하였고, 자기 생활의 마지막 틈새까지 울짱을 두르고 운명의 어떠한 침입도 막아낼 수 있다고 감동적으로 신뢰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서구 유럽인들은 자유주의적 이상주의의 견지에서 세계는 진보하고 있다고 믿었으나, 이 세계가 와해되는 것은 일격의 촉발로서 가능하였다. 슈펭글러는 이성과 진보의 시대를 과거의 것으로 회상하면서 문화와 문명은 표면의 엷은 층에 불과하다고 결론을 지으며 서구의 몰락을 선언하였다.

슈펭글러는 자신의 청춘을 밝혀 주었던 옛날의 별과 하늘을 그리워하면서 ‘데모크라시 반대론’을 주장한 바 있다. 권력은 의회에서 개인적인 서클화된 정당으로 옮겨가고, 선거는 멈추기 어려운 희극으로 타락하며, 화폐금융이 이것을 보유하는 자의 이익을 위한 과정을 조정하면서 지성을 파괴하고, 결국 민주주의를 소멸시킨다고 주장한다.

슈펭글러는 데모크라시와 금융의 과잉이야말로 몰락의 특징이고 이를 막기 위하여는 옛 세계에 속하는 가치, 즉 명예심과 의무감 등에 대한 동경이 필요하다고 하고 있다. 혹자는 이를 두고 게르만 순혈주의를 강조한 나치즘의 전조였다고 주장하나, 정작 슈펭글러 자신은 나치즘을 경멸하여 탄압을 받았다.

슈펭글러의 논리는 극단적이고 비타협적인 면이 있지만,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여러 현상들, 즉 건설업과 금융업에 볼모잡힌 국민경제, 화폐의 과잉으로 침몰해가는 세계경제, 인터넷을 통하여 형성된 여론의 힘에 의하여 과잉이 된 다중의 힘과 이에 편승한 정치가들, 이러한 다중과 정치가들에 의하여 가중되고 있는 파시즘의 전조들 등에 비추어 보면, 슈펭글러의 예언이 가능하지 않은 예언에 불과할지라도, 슈펭글러가 맞부딪혔던 시대적 위기가 다시 도래한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할 것이다.

/김도근 광주지법 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