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전근성’(葉錢根性)이란 말을 우리는 흔히 듣는다. 이 말이 우리 민족을 야유하는 말이라는 것쯤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갈 것이다. 엽전은 옛날 우리 조상들이 썼던 돈. 그런데 이 말이 좋지 못한 뜻으로 쓰여 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엽전은 덮어놓고 눌러야 된다”라는 말 가운데는 일종의 사디즘마저 느껴진다. 아마 엽전을 만들 때 불로 담금질을 해서 두들겨야 좋은 엽전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심리가 이른바 선의의 독재란 낮도깨비를 불러들이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지지리도 못사는 우리가 여북하면 이렇듯 자학과 자기모순을 즐기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면 한심하기만 하다. 수모와 치욕으로 얼룩진 반만년 유구한 역사가 흘러오는 동안 망가진 한국인의 심성이다.

모화와 사대를 나랏일로 삼아온 우리 선조들을 가리켜 중국사람들은 동이(東夷)라 불렀다. 그래도 대국에게는 조공을 해야 했고 소국의 예를 깍듯이 했던 것이다. 강한 사람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교만한 자 앞에서는 아양을 떠는 민족이 된 것이다. 일찍이 우리나라는 신라 통일 이후 한 번도 주체적 주권국가로써 국가체제를 확립하지 못한 채 주변국가 사이에서 사대를 일삼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비극이다. 이와 같은 비극은 우리 것이 아닌 남의 것을 엉뚱하게도 우리의 것이라고 착각하고 고집하는데서 싹텄다고 할 수 있다.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사대와 파쟁만을 일삼아왔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주변에는 새로운 사대주의가 물결치고 있다. 불과 수주일 미국에서 어학연수를 다녀온 아이들이 그새 혀가 꼬부라져서 어머니 나라의 말을 잘 못하더라는 얘기에서부터 구미의 경박한 멜로디에 몸을 비트는 젊은 군상들, 숫제 카레이스키 따위는 눈에도 차지 않는다는 젊은 아가씨들, 코 큰 사람들의 것을 덮어 놓고 좋아하고 그리워하고 흉내 내는 것은 옛날 중국을 사대한 것보다 한 술 더 뜬 일이다.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온 저들은 이미 한국인이 아닌 것 같다. 근대국가 100년간에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면 해답이 보인다. 국민 소득 2만 달러 시대만을 자랑할 만한 일이 못된다.

그래도 옛날 사람들은 염치를 알고 절의를 중하게 여겨 불의의 것이라면 천승만마라도 초개처럼 여기고 고사리를 캐어 먹다 굶어서 죽을망정 불의의 무리와 타협하지 않는 절개라도 있었다.

우리는 근대화가 되면서 민주주의의 원리에 대해서 싫증이 나도록 배우고 들어왔다. 주권은 어디에 있으며 선거란 무엇이며 남의 자유와 권리는 존중해야 한다는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민주주의의 교조를 익혀왔다.

그러나 이처럼 민주주의의 원리를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지나왔는데도 한국은 아직까지도 군부독재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서 진실로 한국인에게는 엽전근성을 버리지 못할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의 진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선진문화국민은 약속될 것을 기대해 본다.

/시몽 장성 백양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