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더위의 끝물이 빠지지 않은 어느 날, 의뢰인 한 명이 9시30분에 있을 형사사건 선고를 듣기 위해 일찍 사무실로 찾아오셨다. 나는 그분께 반갑게 인사를 드렸지만, 조금 후에 알게 될 선고결과에 대한 긴장감과 부담감이 마음 한 구석에서 동시에 밀려오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이 사건은 항소심에서 무죄를 주장하는 사건으로, 무죄 주장을 뒷받침할 법리구성을 위해 적잖이 고민했기 때문에 결과가 더욱 궁금하고 기다려지는 사건이었다.

의뢰인이 9시20분쯤 여직원과 함께 선고를 들으러 법원으로 출발하신 후 1시간이 지나도 깜깜무소식. 1시간 동안 선고결과를 기다리면서 그동안 이 사건을 대하면서 품었던 조심스러운 기대감은 맥없이 사라졌고, 어느덧 나는 ‘결과가 안 좋더라도 의뢰인과 마지막까지 좋은 모습으로 마무리하자’며 내 자신을 다독거리고 있었다.

그 때 사무장님께서 상기된 표정으로 내 방에 들어오셔서 “변호사님, OOO씨 무죄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얼마나 기쁘던지! 그 말 한마디에 이제 막 변호사의 길을 걷는 새내기로서의 그간의 노곤함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듯 했다. 곧이어 의뢰인도 다시 사무실로 찾아와 거듭 감사인사를 하셨다. 그 날 하루 종일 그렇게 힘이 나고 기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난 주말. 어머니와 함께 집 앞을 지나가다가 나무 한 그루를 봤다. 예전부터 그 나무를 볼 때마다 소담스러운 꽃송이와 연약해보이면서도 힘있게 굽이치는 가지 뼈대가 참 멋들어진 나무라고 생각했기에, 옆에 계신 어머니께 그 나무에 대해 여쭤보았다. 어머니께서는 그 나무는 일명 백일홍나무라고도 하는데 백일홍 꽃이 세 번 피고 지면 벼 베기를 할 때라는 말이 있기도 하고, 나무껍질이 없고 반들반들해서 점잖지 않은 나무라고 정원수로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셨다.

남들이야 점잖지 않은 나무라고 한들, 그 순간 나는 엉뚱하게도 백일홍나무 같은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껍질도 없이 그저 연약해 보이는 나무에 불과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뜨거운 여름 땡볕 아래에서도 세 번이나 꽃을 피우는 백일홍나무.

가끔 의뢰인들 중에는 “변호사님께서 너무 어리신 것 같은데…….”라고 말끝을 흐리시는 분들도 계시고, 어린 여변호사로서의 취약함이야 더 말해봤자 무엇하겠냐마는, 그럴 때마다 나는 ‘지금은 비록 어리지만 차곡차곡 내실을 쌓아 훌륭한 변호사가 되겠다’고 다짐하고는 했다. 그런 다짐이 최근 ‘백일홍나무 같은 변호사’가 되어야겠다는 보다 미적인 표현으로 바뀐 셈이다.

최근 형사사건의 좋은 결과는 어쩌면 백일홍나무와 같은 변호사가 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되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주어진 고마운 신호일지도 모른다.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 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라고 시인이 노래했듯이 나 역시 여름의 끝에서, 백일홍 같은 변호사가 되겠다고 다짐해본다.

/김혜민 광주지방변호사회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