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도 훨씬 더 지난 3월 어느 날, 대학 1학년 법학개론 시간에 들은 낯선 말이 있다. “Pacta sund servanda”, “약속(계약)은 지켜져야 한다”라는 라틴어 법언(法諺)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한 도덕률이자 개인 사이의 법률행위를 다루는 계약법의 기초인데, 우리나라에는 “천냥 빚도 말 한 마디면 갚는다”는 다소 동떨어진 속담이 있으니 우리는 민법전에 없는 예외조항을 하나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를 들어 우리 국민성에 약속을 가벼이 여기는 면이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유난히 ‘말의 포장’ 내지 ‘수사(修辭, rhetoric)’를 중시하는 면이 없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서류보다는 말로 일처리를 하는 경향이 있어 종종 ‘진실 게임’ 성격의 법적 분쟁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약속을 지키지 않아 생긴 송사인 민사재판에서는 물론, 유·무죄와 형량을 정하는 형사재판에서도 당사자(피고인)로부터 이런저런 약속의 말과 글을 많이 접하게 된다.

피고인이 써내는 탄원서, 반성문 등의 서류를 보면 ‘다시는 아무리 사소한 잘못도 저지르지 않겠다’는 다분히 공약(空約)성의 수사는 기본이고, ‘이번에 선처해주시면 돈은 (나가서) 반드시 갚겠다’는 등의 구체적이고 때로는 ‘조건부’의 약속을 하기도 한다.

약속의 상대방이 법원(재판부)인지 해당 사건의 피해자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재판부로서는 피고인이 개인적인 다짐을 넘어 누군가에게 약속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논의되는 형법개정안에는 피해회복을 집행유예의 조건으로 신설한 조항이 있다. 지금까지는 피해자와 이른바 ‘합의’를 해야 집행유예와 같은 관대한 처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법감정이었고, 재판실무에서도 합의 즉 피해회복을 중요한 양형 요소로 삼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합의와 관련해서 여러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당장 돈이 없어 합의를 못하여 중한 형을 받는 경우, 돈을 갚겠다는 약속만 하고 피해자로부터 합의서를 받아낸 다음 판결 선고 후에 지키지 않는 경우(속칭 ‘외상합의’), 오히려 피해자가 과다한 합의금을 요구하는 경우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점에서 피해를 배상할 것을 명하면서 집행유예를 할 수 있도록 법에 명시하는 것은 타당한 일면을 지닌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근대 민법전을 편찬한 나폴레옹은 “약속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은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피고인이 한 약속이 법관의 ‘오판’의 단초가 되지 않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아니 많은 피고인들이 나폴레옹의 역설적인 명언을 되새겨주기를 기대하면서 오늘도 약속의 향연이 펼쳐질 형사법정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조의연 광주지방법원 부장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