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지나고 날이 밝을 줄을 언제 알 수 있느냐.” 한 스승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제자들의 대답이 제각각입니다. ‘멀리서 움직이는 것이 개인지 다른 동물인지 구분할 수 있으면 그때 날이 밝은 것입니다’라는 대답부터 ‘나뭇가지인지 사람인지 구분할 수 있으면 그때가 날이 밝은 것’이라는 대답까지. 제자들의 말을 듣고 난 스승은 이렇게 답합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내 이웃으로 보이면 그때가 날이 밝은 것이다”(대지진 피해로 힘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본을 생각합니다.)

지난겨울은 그렇게도 추웠는데 요즘은 연일 따뜻한 햇살이 내리쬡니다. 추운 날들을 보내면서 언제쯤 봄이 오려나 기다렸는데, 바뀐 줄 모르게 계절이 바뀌었습니다. 언제 온 걸까요? 돌이켜 보니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땅속 깊은 곳에서 부지런히 자신이 품은 싹들을 띄울 준비를 해온 모양입니다. 그런데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통해서만 봄을 발견합니다. 겉으로 드러나야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표면에 머물며 깊은 곳에 시선을, 마음을 두지 않는 모습 아닐까 싶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같은 해에 사제가 된 형제들과 동창모임을 갖습니다. 한 번은 동창 두 사람이 한 차를 타고 모임에 왔는데, 도착해서는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불을 환하게 밝혀도 부족할 판에 터널에 전등을 다 꺼놨지 뭐야! 사고 나면 어쩌라고…” 그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같이 온 동창이 그럽니다. “에이구! 불을 꺼놓은 게 아니라, 네가 선글라스를 끼고 운전하니까 그렇지!” 두 사람 이야기를 듣다가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쓰고 있는 안경 색깔대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검정색 안경을 쓰고 있으면 세상은 온통 검은색으로 보이고, 파란색 안경을 쓰고 있으면 세상은 온통 파랗게 보입니다.

육안만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의 눈도 가려져 있으면 세상은 온통 어둡게만 보입니다. 마음의 눈이 미움의 안경을 쓰고 있으면 모두가 다 밉게 보이지만, 사랑의 안경을 쓰고 있으면 세상은 온통 행복으로 가득합니다. 안타깝게도 생활하다 보면 우리는 우리식대로 익숙해진,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에 사로잡혀 그것의 진면목을 못 보는 때가 간혹 있습니다.

물론 외적인 변화를 쓸모없다거나 부정하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리 외적인 변화를 이루어내더라도 그 변화의 실상을 바라볼 눈이 없다면, 그 변화는 나와는 무관한 다른 세상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깁니다.

소록도 환우분들과 아침 미사를 마치고 성당 정문에서 ‘하루 잘 보내세요’ 인사를 건넵니다. 하루하루 고통 가운데서 불편한 몸으로 생활합니다만 그래도 전동차를 몰고 가며 웃음 짓는 교우들의 환한 얼굴이 오늘은 무척이나 고맙습니다. 밝게 기쁘게 하루하루 생활하시길 ….

/서달원 소록도성당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