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로서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짧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이다. 돌이켜 보면 임관하기 전 내가 알고 있던 판사의 역할은 실루엣 뿐이었던 것 같다.

마치 여행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집을 나선 여행자 처럼 내가 지금 맡고 있는 일을 시작한 셈이다. 다행히도 일을 하면서 판사의 역할에 대한 내 생각이 조금은 구체적으로 변한 것 같다.

거대담론의 관점에서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면, 판사는 재판을 통해 한정된 자원을 누가 가지는 것이 정의인지, 어떤 행동이 우리 사회가 허용한 범위를 벗어나고 있는지, 허용된 범위를 벗어난 행위에 상응하는 적절한 처벌은 무엇인지를 선언하는 일을 한다.

판사가 그 역할을 잘 수행하면, 사회구성원은 허용되는 행동의 결과로 얻은 대가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 되고, 허용되지 않는 행동의 결과로 얻은 대가는 박탈당하게 되는 것임을 알게 되고, 그에 따라 허용된 행동 만을 하려고 할 것이다.

판사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사회의 유지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런데, 하루가 다르게 복잡다단하게 변해가는 현대사회에서는 당연한 위 역할 마저도 제대로 해내는 게 쉽지 않다.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법이 그와 같은 사건에 대하여 어떤 것을 정의라고 규정해 놓았는지를 찾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그러다보니 판사들은 다른 이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격무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미시담론의 관점에서 내가 생각한 판사의 역할은 재판을 첨예하게 의견이 대립하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푸는 화해와 평화의 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격무와 스트레스는 재판 과정을 화해와 평화의 장으로 만드는 데 어려움을 준다. 재판을 하게 된 사람들 중 상당수는 법적 지식보다는 다분히 감정적인 주장을 한다. 인간적으로 가까운 사이였던 사람들 사이에 재판이 벌어질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들은 법정에서 법적 관점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판사는 그 때 마다 그 주장에 대하여 말문을 막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한 사건의 재판이 길어지면, 다른 재판을 진행하는 데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그런 주장을 듣는 것보다 기록을 살펴보고 이론적인 연구를 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판사가 그의 말문을 막으려는 시도를 하는 순간 재판이 화해와 평화의 장이 될 가능성은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법이 다수의 의사가 무엇인지를 가리키고 있다고 할 수는 있으나,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리키고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분히 감정적인 주장이 법을 벗어난 윤리의 관점에서는 보다 진리에 가까운 주장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재판 규범의 외연을 법을 넘어서 윤리의 영역까지 확장해 보면 내가 귀 기울이고 싶지 않은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을 수도 있다. 또 그 주장의 의미를 되새겨 재판 관련자들을 설득하는 것이 모든 이가 납득하는 결론을 도출함으로써 재판이 화해와 평화의 장이 되게 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고, 당사자의 진심에 다가가려는 판사의 모습은 그래서 아름답다.

하지만 그와 같은 모습은 수도자와 같은 정진과 인격의 도야를 거쳐야만 만들어질 수 있다. 나는 내게 얼마나 많은 사건에서 재판이 화해와 평화의 장이 되게 할 수 있는지를 묻곤 하지만, 아직도 법정에서 당사자의 서투른 주장을 듣게 되면, 쓸모 없는 이야기를 한다는 감정적 반응이 나타나는 부족한 사람이다. 언제쯤 나는 내가 재판을 통해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할 수 있을까? 그 숙제는 법복을 입고 있는 동안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 머리는 늘 무겁다.

/김승휘 광주고등법원 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