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우체국장이면서 소설가였던 아버지는 저녁때는 꼭 반주를 찾으시고 또 사소한 집안일이라도 거들게 되면 그 대가로 당연히 약주를 청할 정도로 애주가이셨다. 그래도 어머니는 짜증 한번 안내고 즐겁게 술을 내놓으셨다.

나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호기심에 이끌려 슬금슬금 한 모금씩 마셔봤는데 씁쓸하면서도 달짝지근하다가 조금 있으면 어질어질해지는 것에 은근히 재미를 붙였던 것 같다. 우리 집은 손님이 오시면 으레 주안상이 차려져 나왔으며 내가 성년이 되었을 때는 주전자나 병에 남아있는 술은 다 내 차지가 되었다.

그 시절 친구의 누나가 역전에서 막걸리 대리점을 하고 있었고 조금씩 술 맛을 알아가던 친구들이 오다가다 그곳에 들리곤 했는데 그 누나가 잠깐 자리를 비울 일이 있으면 우리에게 가게를 맡기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 대리점에는 막걸리 열 말이 넉넉히 들어가는 커다란 항아리 세 개가 땅바닥에 묻혀있었는데, 우리는 바가지로 두세 번 휘저은 다음 듬뿍 퍼서 벌컥벌컥 한 잔씩 들이켜고 단무지 한 조각 깨물어 먹으면서 마신 만큼 물을 부어 분량을 맞춰 놓았기 때문이다.

얼마 뒤 가게로 돌아온 누나가 “보나마나 한 잔씩들 했겠지?” 하며 우리를 훑어보아도 끝내 안마셨다고 능청을 떨었지만 사실 그 누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수법을 다 알고 있었다.

이렇게 술에 대한 기본 실력을 쌓아가다가 해군에 입대해서 신병 훈련을 받던 중 자나 깨나 기다리던 면회 날이 되었다. 큰 누님과 형님이 함께 오셨는데 형님이 사이다 병마개를 따더니 통닭을 뜯고 있는 나에게 한 잔을 따라주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심코 받아 마시던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것은 사이다가 아니고 소주였기 때문이다. 형님은 술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서 사이다병에 소주를 넣은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때 해군은 신병 훈련기간 중에는 당연히 금주, 금연을 해야 했다. 육군 출신 형님이라도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정말 센스가 있는 형님이었다. 그날은 나 혼자만 오랜만에 해롱해롱하며 신이 났다. 그 뒤 바다로 출동 나갈 때 가끔씩은 형님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그런데 나만큼 술을 즐겼던 어떤 동료가 항해 중에 그만 실수로 공업용 메틸알코올을 마셔서 실명할 뻔한 아찔한 사건도 있었다.

제대 후 직장생활 할 때 아주 엄한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직원이 있었는데 그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술을 마시고 집에 올 때는 대문 앞 30m 지점에서 폭이 30cm되는 선을 긋고 신발이 그 선 밖으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문턱을 넘지 말라.”라고 말씀 하셨다고 한다. ‘술을 마셔도 바른 정신과 몸가짐을 잃지 말라’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세월이 흘러 육십이 넘은 지금도 어떤 친구는 술에 취할수록 마누라가 더 예쁘게 보인다고 히히대더라마는 나는 마음도 느즈러지고 몸도 약해졌는지 이제는 술을 조금만 마셔도 흔히 하는 말로 필름이 끊기기도 하고 또 가끔 본의 아니게 실수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 이래서는 안된다.” 하는 생각을 자주 하다가 결국 술과 인연을 맺은 지 사십여 년이 흐른 이 시점에 와서 그 어떤 획기적인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내 자신의 건강과 나를 걱정해주는 가족들을 위해서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이번 결혼 기념일을 맞아 마누라에게 ‘단주’라는 선물을 주기로 과감히 선언했다.

/이상욱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