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간전교 ‘섬진강 어류생태관’ 옆 둑길에서 바라 본 5월의 섬진강변 풀빛이 짙다. 800여m 길이의 둑길에 이어지는 861 지방도 역시 벚나무 이파리가 온통 초록의 터널을 이루고 있다.

간전교에서 남도 대교까지 10㎞ 구간의 도로는 걷는 내내 초여름의 신록을 맘껏 누릴 수 있다. 대학시절 부친이 보내주신 엽서 첫 구절에 즐겨 쓰던 ‘녹음방초지절’(綠陰芳草之節) 표현 그대로이다. ‘녹음방초’는 푸르게 우거진 나무와 향기로운 풀이라는 뜻으로, 여름철의 자연경관을 이룬다.

이곳은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화사한 벚꽃이 만개해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곳이지만 현재는 지나는 차마저 한산하다.

◇영·호남 어우러지는 화개장터= 전날 내린 비로 인해 황토빛깔을 띤 본류와 달리 강 건너 피아골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옥빛으로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두 물이 만나도 섞이지 않고 자기 색깔을 유지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인열마을, 지리산 농부마을, 만덕선원, 참사리 식품 등 도로변 이정표를 확인하며 걷노라면 어느새 남도대교에 닿는다.

다리 건너편은 가수 조용남의 가요로 널리 알려진 화개장터이다.

화개장터는 지리산에서 시작한 화개천과 섬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열리던 전통적인 재래시장. 지리산 일대에서 생산되는 산나물과 약재, 전라도 곡창지대의 쌀과 보리, 부보상들이 가지고 온 생활용품, 남해안 일대 어부들이 섬진강을 통해 가져온 미역과 고등어 등이 활발하게 거래됐다고 한다. 지금은 초가를 얹은 상시시장이 개장돼 옛 5일 시장의 정취를 찾을 수 없지만 여전히 관광객과 차들로 북적거렸다.

섬진대교에서 광양으로 향하는 길은 1∼3㎞ 간격으로 띄엄띄엄 마을들이 자리하고 있다.

염창(鹽倉)마을, 매각(梅閣)마을, 직금(織錦)마을, 죽천(竹川)마을, 향동 등 마을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걷는 것도 즐겁다. 염창은 짐작대로 고려, 조선시대에 소금을 보관하고 출납하던 창고가 있었다고 하며, 직금은 풍수지리상 비단을 짜는 형국이라는 데서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광양 다압 일대는 매실농사로 유명하다. 한국수자원공사 다압취수장을 지나 다압에 들어서면 도로변 가로수는 물론 눈 닿는 곳마다 초록 빛깔의 매실열매가 달려있다.

홍쌍리(청매실농원 대표·전통식품 명인)씨가 1965년 시집온 후 46년간 척박한 땅에 매화나무를 심고 가꾸며 소득으로 연결시키자 주위 주민들이 가세해 너도나도 매실나무를 심으며 섬진강변이 온통 매화꽃밭으로 변모했다.

섬진마을을 지나 섬진강 매화로변에 자리한 수월정(水越亭)은 섬진강을 조망하며 땀을 식히기에 좋은 곳이다. 전망이 탁 트인 뷰포인트인데다 세찬 강바람이 몰아쳐 강물도 너울너울 출렁거린다.

수월정은 조선 선조때 나주목사를 지낸 광양 출신 정설 선생이 만년을 보내려고 1573년에 세운 정자이다. 훗날 송강 정철은 이곳을 찾아 “물은 달을 얻어 더욱 맑고, 달은 물을 얻어 더욱 희다”고 읊었다. 수월정 바로옆에는 다사강(多沙江), 두치강(豆置강)으로 불리다 섬진강으로 바뀐 내력을 적은 유래비와 섬진진지 석비 좌대가 있다.

구례군 간전면과 경남 하동 화개면을 잇는 남도대교.

◇강의 끝, 바다의 시작 망덕포구= 섬진강변에는 수천 년 이어 내려온 삶의 자취와 문화터전들이 숨 쉬고 있어 ‘문화 회랑(回廊)’이라 불린다. 섬진나루는 1930년대 하류에 다리가 가설되기 이전까지는 경남과 전남을 잇는 영·호남 교통의 요충지였다고 한다. 섬진교 앞 신원 삼거리에서 300여m 지난 원동 삼거리에서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861 지방도는 강변으로, 국도 2호선은 산을 넘는다. 모래톱과 잔물결이 눈길을 잡아끈다.

강둑길을 따라 내려가면 오른편은 오이 등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 단지로 빽빽이 채워져 있다. 강물이 범람하며 실어나른 충적토(沖積土)가 주민들 삶에 윤기를 더하고 있다.

금동마을에서 끊긴 둑길을 어렵사리 다시 찾아 농어촌도로 103호선 공사가 한창인 곳을 지나 돈탁마을로 들어선다. 공사장과 돈탁마을 구간은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다닐 만한 오솔길에서 색다른 정취를 안겨준다.

돈탁마을에는 강둑과 나란하게 100여 그루의 소나무 풍치림이 조성돼 있어 일품이다. 마을이름은 거북등처럼 ‘둔덕에 자리잡은 마을’이라해서 ‘돕태기’, ‘돈태기’에서 유래됐다.

돈탁마을에서 제방 비포장 도로를 따라 3㎞를 걸으면 한국농어촌공사 오사 배수장에 닿는다. 이곳에서 섬진강 길 종착지인 망덕포구까지는 4㎞.

망덕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를 뜻하는 ‘망덕귀범’(望德歸帆)은 광양 10경(景)중 하나이다. 이곳은 재첩(갱조개)와 전어, 강굴을 키우는 삶의 바다이다.

전북 진안 백운면에서 발원한 강물은 500여리를 흘러 내려와 포구에서 가쁜 숨을 죽인다. 이곳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태인대교와 연결된 태인도가 있고, 바다를 메워 세운 광양제철이 있다.

섬진강 길은 아직 완전하게 정비되지 않아 지방도나 비포장 둑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 이에 따라 광양시는 오는 9월께부터 2013년까지 남도대교∼섬진교 구간 21.3㎞에 사업비 100억원을 투입해 섬진강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두텁(두꺼비를 뜻하는 옛날식 표현)을 컨셉으로 한 ‘섬진강 두텁길’을 조성한다.

시는 ▲하나 되는 길 ▲은빛모래 길 ▲불로장생 길 ▲매화꽃길 등 4개 권역으로 나눠 노선폭 2m의 보행자 위주 보도를 만들고 종합안내소, 휴게거점, 조망점을 세우는 한편 기존 마을 길과 연결시킬 구상이다.

광양시 황형구 문화관광계장은 “섬진강은 5개강 가운데 생태가 살아있는 강”이라며 “섬진강을 중심으로 영·호남의 자연과 문화, 가치가 살아있는 친환경 생태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글·사진=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