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줄 형량’. 이는 언론을 통해 익숙해진 말로 언제부터인가 사법 불신의 대명사가 돼 버린 단어다. 국민은 이 말을 듣는 것만으로 화가 날 것만 같다. 도저히 법관들이 미덥지 않을 것 같다.

법관들로부터 양형(量刑)의 재량을 죄다 빼앗아 와야만 할 것 같은 사명감이 치솟을 것 같다. 법관인 내가 들어도 그렇다. 고무줄 형량이란 조어(造語) 자체가 다소 선정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탓만은 아닐 것이다. 국민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바가 있을 것이다. 현재 이 상황에서 “형량을 정하는 것은 원래 그래야만 되는 것이다. 세상에 똑같은 사건이 없으니 사건마다 형량이 다른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자판기를 통해 판결문을 뽑아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 있는 것”이라고 토를 달았다간 국민을 더 화나게 할 게 뻔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분명한 이유가 있다. 국민의 시각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진지하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법관들은 독단에 빠지지 않도록 늘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법관들 사이의 양형 편차를 줄이기 위해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이쯤에서 숨 한번 고른 뒤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 재판부에서 지난해 절도범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을 했다. 피고인이 길가에 세워진 봉고차 뒷문을 열고 야채 등 먹을거리를 훔치려다 발각돼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배심원들의 일치된 의견에 따라 징역 3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불행하게도 그 형량은 배심원들이나 법관이 선택할 수 있는 최하한의 형이었다. 절도 범죄로 2번 이상 실형을 선고받고 그 집행을 마친 뒤 3년 내에 다시 절도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 무기징역이나 징역 6년 이상에 처하도록 되어 있는 특별법의 규정에 의한 것이다.

특별법 등을 만들어 법관의 양형 재량권을 과도하게 축소하려고 하는 한(특히 형의 하한에 대한 재량권 축소), 그 초라한 사람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해야 된다는 의견을 내며 죄스러워하던(?) 배심원들의 모습을 자주 보아야만 될 것이다.

무겁게 발을 떼던 배심원들의 뒷모습을 또 보아야만 될 것이다. ‘고무줄 형량’, 그것이 사실일지는 모르나 진실이 아닐 수 있다.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담을 넘은 아이와 유흥비 마련을 위해 담을 넘은 사람이 있다.

동일한 행위를 한두 사람에게 서로 다른 형을 가하였다. 이를 두고 ‘고무줄 형량’이라 한다면, 그것이 사실일지는 모르나 진실은 아닌 것이다. 법관의 양형은 사실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실을 찾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진실을 모른 척 하거나 애써 감추고 ‘고무줄 형량’이라고 윽박지르고 두들겨 패기만 하다 보면 슬그머니 자판기 형량(?)이 일반화될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자판기 형량이 재판 불신의 주범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판사는 어디 가고 자판기 재판이 왠 말이냐. 자판기 형량은 이제 그만. 제발 그만. 고무줄 형량(?) 없는 사법부는 각성하라”는 피켓시위가 줄을 이을지도 모른다.

항소심 재판을 하다가 초콜릿 1개, 과자 한 봉지, 담배 한 갑을 훔친 피고인에게 (법관이 선고할 수 있는 최하한의 형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한 1심 판결문을 대한 뒤 이런저런 생각에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매 순간 내 앞에 놓인 사건마다 가슴을 열고 겸손한 마음으로 다가가자. 참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그 앞에 서자. 사실보다 중요한 진실을 찾기 위하여.

/송희호 광주지방법원 부장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