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사람의 죄 없는 사람을 벌하여서는 안 된다’는 말처럼 죄 없는 사람을 유죄로 오판하는 것은 형사재판에서 배제해야 할 가장 중대한 이념이다. 그러나 필자는 헌법과 형사소송법 교과서에서 강조되는 이와 같은 ‘의심스러운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실제의 형사사건 실무에서 제도적으로 구현되고 있는지 스스로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피고인에 대해 헌법과는 반대로 유죄추정의 원리에 따른 예단을 부지불식간에 가졌다가 죄 없는 시민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할 뻔한 아찔한 경험이 필자에게 몇 차례 있음을 고백하면서 가장 최근의 사건을 소개하기로 하겠다.

피고인과 고소인은 모두 65세 정도의 여성이었다. 피고인은 재산적인 분쟁으로 고소인과 말싸움을 벌이던 중 고소인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 고소인의 얼굴을 5회가량 때리는 한편, 얼굴에 침을 뱉고 손가락을 할퀴는 폭행을 가했다. 또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하면서 고소인의 영업장에서 업무를 방해하였다는 공소사실로 기소됐던 사건이다.

이 사건을 변호하면서 필자는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수사기록과 관련 증거를 면밀히 읽어보고 검토한 결과 피고인의 유죄를 추정하는 선입견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고소인의 고소장에 피해 사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었고, 피해부위를 촬영한 사진과 목격자의 진술조서까지 합리적으로 제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피고인은 홀로 억울하다는 취지의 진술만 반복할 뿐 피고인의 변소를 뒷받침할 만한 아무런 증인이나 증거서류도 제출하지 못한 채 기소된 상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부끄러운 일이다. 필자는 설마 고소인이 자해해서 피해사진을 촬영하고 목격자도 조작했겠느냐고 피고인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궁하면서 피고인에게 자백하고 선처를 받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취지로 설득했다. 피고인이 변호인의 설득에 응하지 않자, 필자는 하는 수 없이 속는 셈치고 피고인이 주장하는 대로 믿어주는 것도 변호인의 역할이라는 의무감에서 변호를 시작했다.

이 사건 재판은 계속되는 목격자의 불출석으로 재판과정에서 실체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진통을 거듭하였고, 아주 이례적인 사실관계가 새롭게 발견돼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다가 변론이 종결됐다. 재판부는 지난 4월20일 피고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목격자가 범행을 목격하지 못했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과 피고인의 범행을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인 CC-TV(폐쇄회로) 녹화내용을 지운 이유가 석연치 않은 점 등을 근거로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검찰은 매우 이례적으로 항소를 포기, 피고인에 대한 무죄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검찰의 항소 포기는 피고인의 말이 경험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믿지 않은 채 수사기록만을 열심히 읽고 유죄선입견을 가지고 변호를 시작했던 필자를 더욱 부끄럽게 만들었다.

필자는 이 사건을 변호하면서 재판의 마지막 순간까지 실제 진실이 무엇인지 두 여인의 상반된 주장 앞에서 적잖이 당황하고 고민한 것이 사실이다. 고소인의 주장이 허위사실이라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은 피고인이 아니라 고소인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현재도 피고인들을 만나고 변호하고 있다. 피의자와 피고인을 변호하는 변호인이 가지는 선입견은 일상적인 변호업무의 익숙함에서 비롯된 기록만 보고 정작 당사자와는 대화를 제대로 하지 않는 매너리즘의 반영이 아닌지 반성해 본다.

사실관계는 당사자만이 알 수 있고 법률가는 법률을 알 뿐이어서 피고인과 충분한 대화를 통하지 않으면 변호인이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당사자와의 대화는 번거롭고 기록을 읽는 것은 편리한 일이니 변호인은 기록을 통해 본 선입견과 예단으로 피고인을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또 돌아 볼 일이다.

/김정호 광주지방변호사회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