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타는 KTX는 참 빠르기도 합니다. 최근 고장이 잦아 말이 많다지만 매일 기차를 타고 출퇴근하는 것이 아닌 이에게 기차를 타는 일은 설렘이고 즐거움입니다.

차창 밖으로 늦은 모내기하는 풍경이 스칩니다. 먼발치에서 보아도 이앙기를 운전하는 이는 마을에서 젊은 축에 끼일 아저씨일 테고 모판 옆에 앉아 음식을 차리는 이는 그 댁 아주머니 아님 논 임자일 테지요.

우물가에는 빠알간 앵두가 익어가고 뒤뜰 매실이 통통하게 살이 오를 요맘때면 동네는 온통 활기가 넘쳐났습니다.

어른들은 품앗이로 동네 모내기를 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농번기에는 농사일을 돕기 위한 휴일이 있었고, 학교에서 단체로 모내기에 나서는 일이 많았으니까요.

그런데 이 모내기에도 좋은 보직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못줄잡이 입니다. 남들은 다리를 걷어붙이고 흙탕물을 얼굴에 튀겨 가며 허리 아프게 모를 심을 때 논두렁에서 줄만 잡고 있으면 되는 자리니까요. 별 기술도 필요 없이 길게 늘어선 뜀줄에 따라 못줄만 옮기면 되는 건데 대개는 축구를 하다 다리를 다치거나 배 아프다 엄살 부리는 녀석들 차지였지요.

간식이 귀하던 시절이라 새참에 주는 라면땅이나 단팥빵은 요즘 맛있다는 전문점 케이크에 비할 바 아니었고, 일만 마치면 논에서 그냥 집으로 갈 수 있는 비공인 반공일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모내기의 백미는 점심이었습니다. 그 시절 못밥으로는 무를 삭둑 잘라 넣은 갈치조림이나 돼지고기가 깍두기처럼 들어간 김치찌개를 내는데, 평소 보기 어려운 반찬들이 나오고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까지 챙겨야 하니 점심때는 서너 사람이 이어 나르거나, 리어카에 실어 나르곤 했습니다. 어머니와 누나가 찬통을 이고 나가면 뒤따르는 아이 손에는 막걸리 주전자가 들려 있고, 머리통이 큰 녀석들은 술 심부름 오가다 마셔 본 막걸리에, 일찌감치 주당의 길로 들어서기도 했었지요.

며칠 전 동창회에서 만났던 선배는 김포에 사는 누님댁에 모내기를 다녀왔는데 논두렁에서 중국음식을 시켜 드셨다더군요. 자장면을 주문하는 전화 말미에 꼭 맥주 몇 병도 사오라는 부탁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팁에 어쩐지 그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은 변해가고 농촌도 고향도 달라져 가고 있습니다. 온 동네 잔치였던 모내기 풍경이 사라지고 지나던 사람 다 불러 먹던 못밥을 더 이상 맛볼 수 없더라도 그 시절 푸짐한 인심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논두렁 사이 흐르는 시냇물을 뒤져 우렁이며 미꾸라지를 잡듯 오래전 품앗이하던 협동정신도 조금만 뒤적이면 꿈틀대며 튀어나와 우리네 양식이 되고 더욱 새로운 문화가 될 수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옥영석 농협중앙회 유통센터분사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