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지나간 자리에 빛바래고 시든 낙엽이 날리고 쌓인다. 곱게 채색한 단풍일지라도 거리에 나뒹구는 낙엽의 신세가 되고 나면 애처롭기만 하다. 속절없이 날리는 게 낙엽만은 아니다. 가을 하늘 아래 시들고 삭아 뒹구는 것들이 허다한 가을의 색채를 정비석은 청각적 이미지와 더불어 애잔함으로 읊었다.

“섬돌 밑에서 밤을 새워가며 안타까이 울어대는 귀뚜라미의 서글픈 울음소리며, 불을 끄고 누웠을 때에 창문에 고요히 흘러넘치는 푸른 달빛이며, 산들바람이 문풍지를 울릴 때마다 우수수 떨어지는 서글픈 소리며, 가을빛과 가을 소리치고 어느 하나 서글프고 애달프지 않은 것이 없다.”

결실에 대한 탄성도 없지는 않지만, 서운함과 허전함에 대한 감회가 더욱 애틋한 계절이다. 어쩌면 일시적인 결과에 대해 탐닉하기보다는 곧 다가올 겨울의 공허함을 미리 예단하는 게 우리의 심성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한 수목의 가슴 아픈 선택이 화려하게 떨구는 단풍임을 생각하면 가을은 더욱 숙연해진다.

하지만, 봄 가뭄, 장마, 염천과 태풍의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고단함과 아픔을 잠재우고 또다시 혹한에 대비하는 계절이기에, 가을은 내면을 깊이 성찰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작품이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이다. 낙목한천(落木寒天)의 계절에 국화가 아름다운 것은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을은 성취를 위한 고난의 과정과 견딤의 철학을 잠도 잘 수 없었다는 시적 표현으로 승화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더욱이 가을이 되면 수목은 채움과 결실의 미학에서 잎들을 하나 둘 대지로 돌려주는 비움의 미덕을 발휘한다. 나뭇가지 사이로는 쓸쓸함 대신 맑고 푸르기만 하늘을 더 많이 열어준다. 그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은 겨울을 알리는 스산한 바람이 아니다. 여름의 고통을 이겨낸 가을걷이의 성숙함과 풍요로움이 진한 여운으로 남아 있는 살가운 바람이면서, 자연의 흐름 속에서 비움과 되돌림의 미학이 실현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가을의 비움은 겨울을 거치며 새로운 채움을 향한 통로이기에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라고 시인 도종환은 노래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원수는 “불타오르듯이 빨간 단풍을 바라보는 동안은 유유관조의 멋이 무던해 나도 모르게 살아있다는 맛이 야금야금 피어올라 실상은 가렵지도 않은 사타구니 근방을 긁어본다.”고 설렘으로 가을을 이야기하였는지도 모른다.

정작 기나긴 겨울밤을 제치고 가을밤을 ‘추야장(秋夜長)’이라고 했다. 아폴리네르는 안개에 갇힌 고독 속에서 가을이 여름을 죽였다고 했지만, 숨 가쁘게 달려오느라 미처 보지 못한 내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가을밤이다. 가을밤, 내면의 뜨락에서 상념에 젖다 보면 지난여름의 방종과 아픔조차도 성숙의 한 과정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해가 저물고 풀벌레 소리 속에서 낙엽이 바람에 뒹굴기 시작하면, 과일의 마지막 성숙을 위해 이틀의 햇빛을 기원했던 릴케와 더불어 가을의 황금빛을 거닐게 된다. 그 안에는 채움과 비움, 되돌림의 미학 속에서 한 송이 국화꽃의 개화를 위한 마지막 성찰과 사색이 깃들어 있다. 곱게 물든 단풍, 삽상한 바람, 풀벌레 소리 속에서 여무는 가을은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김창균 광주시교육청 장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