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을 전후한 노부부가 아파트에 살고 계신다. 가사도우미와 요양보호사가 매일 오고 바로 옆 동의 딸, 그리고 가까운 곳에 사는 아들 내외가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두 분을 보살핀다. 또 갓 결혼한 손녀들과 사위들이 온갖 애교로 두 분을 기쁘게 해드려서 할아버지는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행복해서 눈물을 흘리신다.

할머니는 수년 전부터 주위 사람들을 크게 괴롭히지 않는 소위 ‘예쁜(?) 치매’를 앓고 계시고 할아버지는 그 연세에 비교적 건강한 편이다. 식탁에는 치매약, 변비약, 칼슘, 글루코사민 외에 비타민과 건강에 좋다는 각종 크고 작은 약병들이 즐비하다. 매년 약병 수가 늘어간다.

아침이 되면 할아버지는 거실 환기를 시킨 다음, 신문을 꼼꼼하게 챙겨 읽고 반세기 넘게 하던 냉수마찰은 생략하고 실내운동으로 만족하신다. 할머니가 잠을 깨면 큰 소리로 구령을 붙여가며 할머니 운동을 시켜드리고 그 사이 딸이나 가사도우미가 준비한 식탁으로 지팡이를 짚고 할머니와 함께 나오신다. 식사 후에 할아버지는 할머니 양치질을 시키고 웬만한 수발을 기꺼이 맡아 하신다.

할머니는 치매 외에도 허리가 90도가 될 만큼 굽어서 지팡이도 두 개를 짚고 겨우겨우 걷고 흰머리, 여윈 얼굴에서 옛 미모나 기품은 찾아볼 수 없어도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너무도 사랑스럽다.

매일 거르지 않고 사랑 고백을 하신다. “내가 당신을 너무도 사랑한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천 배, 만 배는 더 사랑한다. 당신은 참 예쁘다”라며 볼이며 손등에 수없이 입맞춤을 하신다. 뿐만 아니라 “여섯 자식을 배 아파 낳고 기르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심했는가? 그래서 이렇게 매미 껍데기처럼 가죽만 남았지.”라고도 하며 할아버지는 병들고 여윈 아내를 쓰다듬으며 안쓰러워하신다.

두 분은 다정하게 소파에 붙어 앉아서 TV도 보고 서로 어깨에 기대어 낮잠도 즐긴다. 건강에 좋다고 손뼉을 치면서 우리 가요뿐만 아니라 독일어로 들장미도 함께 부르신다. 치매는 최근의 기억을 잃을 뿐 예전에 알았던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기억하는 신기한 병이다. 할머니가 젊어서 외웠던 80곡의 찬송가 중 상당수는 지금도 곧잘 부르신다. ‘배움에 때가 있다’는 말은 분명한 사실이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배워두라’는 말은 모든 이가 새겨들어야 할 교훈이다.

낮 동안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다녀가도 밤이 되면 결국 두 분만 남는다. 잠자리에 들기 전, 할아버지는 오늘도 평안한 날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그리고 아내에게 닭살 돋는 사랑 고백을 다시 시작한다. 마치 자장가처럼 두 분 중 누군가 먼저 잠들 때까지.

할머니도 때로는 진심을 담아서 분명한 어조로 이러한 할아버지의 지극한 사랑과 수발을 고마워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신다. “고마워요.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라고.

두 분은 젊고 건강할 때보다 더 많은 가르침을 자녀들에게 주고 사랑이 무엇인가를 몸으로 보여주신다. 남남끼리 부부로 만나서 때로는 다투고 원망도 하지만, 참고 살아온 인간의 사랑이 저토록 진하고 지순할진대, 하나님의 사랑이 저만 못하랴 싶어 저절로 신심이 깊어진다. 이 노부부는 바로 나의 부모님이시다.

〈박행순 전남대학교 명예교수·(사)국제과학문화협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