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연말정산과 치아 임플란트 등 몇 가지 일 처리를 위해 집에 왔다가 입춘을 막 지나고 네팔에 두 번째 들어왔다. 내가 네팔 체질인지 이곳이 더 이상 낯설지 않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교과서, 전기 압력밥솥 등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쌌더니 짐 허용량인 30㎏의 두 배나 되었다. 짐을 줄이기 위해 꼭 필요한 것만을 엄선해야 했다.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중차대한 문제라서 새로 산 밥솥을 일 순위로 꼽고 필수 식료품, 최소한의 교과서, 그리고 두어 벌씩의 계절 옷으로 품목을 한정하였다.

멸치는 똥을 빼고 말려서 가루를 만들어 부피를 줄였다. 수북이 모아진 멸치 똥으로 눈길이 가자 내 특유의 창의력이 발동하여 희한한 밑반찬을 만들었다. 잘게 썰어 양념한 소고기를 양파와 함께 볶고 고추장과 설탕에 포도주를 몇 숟갈 넣어서 멸치 똥과 함께 볶다가 다진 마늘을 넣고 참기름을 치니 매콤, 달콤, 쌉쌀한 아주 독특하고 맛있는 밑반찬이 되었다.

쓰레기통에 들어갈 멸치 똥이 네팔로 가져갈 특식으로 탈바꿈하여서 나를 기쁘고 흐뭇하게 만들었다. 동생에게 맛을 보라니 “멸치 똥이 네팔까지 가고 출세했다”면서 혐오식품 대하듯 도리질을 한다.

인천공항에서 대학 남자동기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내가 “안쓰럽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해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내 자신이 갑자기 안쓰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받는 이메일 중에는 식사 잘 챙겨 먹고 건강하게 있으라는 당부가 많다.

직항인 대한항공으로 7시간 반의 비행이 끝나고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 시계 바늘을 3시간 15분 뒤로 돌렸다. 네팔은 아직 겨울인 줄 알았는데 오후의 햇볕이 너무 따가워서 초여름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해가 지자 겨울 날씨처럼 추워졌다.

짐 정리가 끝난 시각은 저녁 8시가 훨씬 넘어서 배가 고팠다. 밥솥은 가져왔으나 밖에 나가 쌀을 살 시간이 없었고 밤길에 나가자니 개들이 무서웠다. 굶고 자기는 싫어서 가져온 미역에 마른 새우와 홍합을 넣고 미역국을 끓였다. 곡기가 없는 것이 아쉬운데 흑미차와 천마차가 눈에 띄어 넉넉히 풀었더니 새로운 요리, 미역죽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절대로 생각해내지 못할 새로운 조합인 것이다.

내가 네팔에 살면서 개발한 요리, 닭밥도 소개하고 싶다. 닭밥이란 내가 붙인 이름으로 닭 모이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밥할 때에 네팔 토종닭다리를 넣었더니 삶은 것보다 훨씬 더 고소해서 닭다리는 소금을 찍어 맛있게 먹고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밥은 양념장으로 비벼먹는다. 음식 만들기를 간소화하다가 생겨난 요리이다.

네팔이라는 새로운 환경이 내게 창의력 개발 기회를 주며 나는 이런 것들을 즐긴다. 멸치 대신 멸치 똥을 식재료로 쓰고 포도주만 몇 숟갈 더 넣어서 멸치 볶음과는 다른 차원의 밑반찬을 만들고, 쌀이 없어서 미역죽이 태어났으며, 콩나물밥 하는 식으로 닭밥을 만들어 먹으며 행복해한다.

이런 것들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창조가 아니라 응용일 뿐이다. 내가 네팔에서 겪는 독특하고 다양한 경험들,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배우고 깨닫는 것, 서로의 다름을 알아가는 것들은 나의 새로운 자원, 창의적 응용거리가 되어 나의 여생을 보다 풍성하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객관적인 환경은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사람들의 염려와 달리 나는 네팔에서 씩씩하게 잘 살고 있다. 때때로 가족과 친구들이 그립고 이층 아파트의 베란다 앞에 해마다 피어나는 목련꽃이 눈에 선한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박행순 전남대학교 명예교수·파탄의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