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에서 정년퇴임 후 네팔의 대학에 와서 가르치면서 뜻밖의 재미와 보람을 느끼며 살고 있다. 어떤 미국인 방문 교수가 나보고 “이런 재미있는 기회를 제공받으니 학교에 돈 내고 있어라”고 농담을 한 적도 있었다.

봉급을 받지 않는 대신, 대학에서는 초청비자(gratis visa)를 받게 해주었고 꽤 괜찮은 숙소를 구내에 마련해주고 세 끼 식사도 병원 식당에서 무료로 제공한다. 바깥사람들은 숙소에 온 종일 전기가 들어온다는 것을 가장 부러워한다. 관광객들에게 만 오천 원을 받는 왕궁 박물관도 나는 무료입장이었다. 분명 이런 다양한 혜택을 즐기고 감사하지만, 내게 가장 큰 보람과 기쁨을 안겨주는 것은 학생들과의 관계이다.

모든 강의는 최대한 축약하여 파워포인트로 진행하고 강의파일을 학생들에게 공개한다. 학생들을 9명씩 소그룹으로 나누어서 PBL(Problem Based Learning) 방식으로 각 분야별 사례를 한 주 동안 2시간씩 3회, 그리고 마지막 정리를 포함하여 총 7시간에 걸쳐 토론식으로 교육한다.

PBL 담당 교수들 역시 토론을 통하여 사례 내용을 미리 파악하고 수정, 보완하는 사전 미팅이 있다. 해당 사례의 전공자가 기초 자료와 질문내용, 답까지 나와 있는 PBL 교재를 매주 제공하기 때문에 미리 읽고 준비를 해야 한다. 약간의 부담이 있고 긴장도 되지만 시례들을 배우는 즐거움이 있다.

내가 맡은 PBL 그룹은 여학생이 다섯, 남학생이 넷이다. 적절한 질문으로 토론의 흐름을 잡아주고 시간을 조절하면서 나도 학생들과 함께 공부한다. 학생들은 자기들끼리 질문하고 가설을 세우고 공부해온 것을 서로 토론하는데 눈빛들이 살아있고 PBL 시간에 많이 웃는다. 마지막에 각자 느낀 점을 나누고 그날의 자체 평가를 할 때, 진행 교수가 자기들을 잘 이끌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빼놓지 않는다.

지난 5월 초에는 바이바(Viva) 시험이라는 것을 보게 했는데 우리나라 의대의 소위 ‘땡시험’ 같은 것이다. 정확히 5분마다 벨이 울리면 바로 다음 분야로 이동한다. 쉬는 시간에 돌아보니 문답, 간단한 실험, 계산, 슬라이드 판독 외에 바짝 마른 사체도 한 구 시험 문제로 올라와 있다. 1학년들은 너무 긴장한 듯 대답이 미흡했지만 2학년들은 진찰도 문제로 등장했는지 청진기까지 목에 걸고 제법 의젓하게 답변을 잘했다.

자체적으로 문제를 만들어 TV 쇼에서 보는 제퍼디(Jeopardy)라는 학습용 게임도 진행했다. PBL 그룹별 경쟁을 통하여 답을 맞히면 점수가 올라가고 최우수 팀은 큰 초콜릿 상자를 상품으로 받았는데 모두가 즐기면서 배우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한국에서는 교수의 역할이 교육, 연구, 그리고 학생지도였다. 대학원생은 물론이고 학부생과도 지도교수제도에 따라 몇 년 동안 함께 하다 보면 사제간에 정이 쌓였다. 여기 교수들은 교육 외에는 학생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내 설명을 듣고 이상하다는 차원을 넘어서 자기는 강의 외에는 학생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도 말했다.

나는 내 그룹 학생들에게 개별 상담을 제안했더니 모두 좋아했다. 절대 진리를 찾으려고 고민하는 학생, 비싼 학비, 열악한 기숙사 환경 등 고충도 털어놓는다. 그러나 공통주제는 졸업 후 무의촌에 가서 봉사하는 것을 의무가 아니라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었다. 장학금을 받지 않아서 무의촌 봉사 의무가 없는 학생들도 같은 말들을 했다. 남들에게 하지 않는 마음속 이야기를 나는 이해할 것 같아서 말한다고 했다.

나는 이 대학의 비전이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가슴에 열정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감격했다. 남학생들과는 악수를 하고 여학생들은 가볍게 안아 주었다. “선생님, 제가 이날을 기억할 거예요”라면서 눈물을 글썽거리는 한 여학생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바로 그날 이후, 나는 이곳에 오래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파탄의대 객원 교수·전남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