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원칙’이란 교통규칙을 스스로 준수하는 운전자는 다른 사람도 그것을 준수할 것이라는 믿음 아래 행동할 수 있고, 상대방이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거나 규칙을 위반할 가능성까지를 미리 예견해 조치해야 할 의무는 없다는 형법상의 법리라고 한다.

필자는 의학전문대학원생들을 위한 윤리강좌를 준비하다 이 원칙을 알게 됐다. 요즘 의학전문대학원 교육과정에는 의학윤리니, 의학직업전문성이니 하는 강좌가 도입돼 있다. 두 강좌에 참여하고 있는 필자는 적지 않은 의문을 품게 됐다. 갈수록 의학지식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복잡한 사회에서 왜 의학도들에게 귀중한 시간을 쪼개 이런 과목들을 가르치게 하는가? 그 의문에 대한 필자 스스로의 답은 오늘날의 사회가 윤리적 소양을 더욱 충실히 갖춘 의사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사회적 요구는 어디에서 기원하고 있을까?

의학윤리에서 강조되는 덕목의 하나는 신뢰이다. 또한 신뢰는 의학직업전문성의 기본 전제이자 핵심 요소가 된다. 설탕물을 먹으면서도 질병에 효과가 입증된 약이라고 믿고 먹으면 실제 질병 치료에 효과를 보는 경우가 있고, 이를 위약효과(Placebo effect)라고 한다. 비슷한 원리로 믿음직한 의사가 던지는 질병치료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는 혈액순환도 개선해주고 통증을 완화해 줄 수도 있으며, 힘든 치료를 견뎌낼 에너지를 환자에게 전해줄 수 있다.

다시 거리에서의 신뢰의 원칙으로 돌아가 보자. 운전을 하고 있는데 반대 측에서 주행해오는 차량이 중앙선을 마구잡이로 넘어설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한다면 우리는 운전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비슷한 상황이 진료실에서도 종종 벌어지고 있다. 의사의 진단을 믿지 못해 다른 병원에서 같은 진료를 반복하기도 하고, 혹은 치료결과에 대한 의사의 설명을 수긍하지 못해 난폭한 소동이 벌어지곤 한다.

반면 의사는 혹 자신이 그런 상황의 당사자가 될까봐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병든 몸을 이끌고 진료실을 찾는 환자들은 자신의 병을 감쪽같이 치료해 줄 믿음직한 의사를 찾게 마련이다. 그 마음이 불안할수록 그 믿음직함에 대한 기대는 더욱 강렬해진다. 반대로 그러한 기대치의 상승은 진료실의 의사들을 한층 위축시키고 심지어는 방어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어느새 의사·환자 간의 신뢰에 야금야금 금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법의학에 종사하는 의사들은 자신의 전문성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가치로 여긴다.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사회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전문가로서의 생명이 끝난 것이라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그런 신뢰에 도전이 되는 판결이 있었다.

자신의 만삭 아내 사망사건에서 범인으로 지목됐다가 1, 2심 유죄 판결을 거쳐 3심에서 파기 환송된 판결이 그것이다. 임산부가 순간적인 어지러움에 중심을 잃고 넘어져 이상자세에 이르러 질식사했다는 것이 변호인 측의 주장이다. 그러나 부검을 집도한 검시기관이 제시한 사인은 목졸림사였다.

부검결과만으로 범인이 직접 지목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범인이 있는 죽음(살인, 과실치사)인지, 범인 없는 죽음(사고사)인지 만을 구별해 주는 경우가 더 흔하다. 여기서 떨칠 수 없는 의문이 고개를 내민다. 왜 그들은 사고성 질식사를 주장하면서 검시기관이 제시한 목졸림사는 애써 부정하고 있는가? 왜 진범을 잡아달라고 수사기관에 강력하게 요구하지 않을까? 전문가에 대한 신뢰를 흔드는 판결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지금이라도 “… 그렇다면 범인을 잡아주세요”라고 말해 준다면 좋겠다. 자신이 사고 상황을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는 전제 아래 보내는 안타까운 당부이다.

〈조선대 의대 법의학교실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