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 되어서야 파탄의대의 신입생 선발이 끝나고 10월 첫 주에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1600여 명의 지원자 중에서 최종 55명이 선발되어 30: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이 대학 입학과 관련하여 두 가지가 특이하다. 우선 네팔의료협회에서 각 대학을 평가하여 매년 입학정원을 결정한다. 파탄의대는 신설대학으로써 두 학과에 정교수가 없다고 5명의 입학생을 감축당했다. 대충 꾸며낼 수도 있었겠지만 당국자들은 진실과 정직을 고집하면서 불이익을 감수했다. 또 파탄의대에는 직원 자녀에게 배정되는 한 자리가 있다. 일차 합격생 중에서 장기 근속자의 자녀가 1점의 가산점을 받을 때, 부모의 직급이 낮을수록 10점까지 가산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카스트 계급사회에서 약자에 대한 이런 파격적 배려가 놀라울 따름이다.

3일간에 걸친 오리엔테이션에서 대학의 비전과 이념, 교과 과정 설명 등에 이어 입학식이 있었다. 입학식에 산간벽지에서 세 명의 여성들이 지역대표로 참석하였다. 대학의 설립 목표가 이 학교에서 배출하는 의사들을 통하여 도시와 시골의 의료 격차를 줄이는 것이기에 현지 대표들을 신입생 선발과정부터 참여시켰다고 한다. 남존여비 사회인 네팔이지만 여성들을 대표로 뽑았다. 출산과 자녀 양육을 맡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그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 절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입학식은 교육계와 외국 자문위원단 대표에 이어 부총장의 축사와 당부로 이어졌다. “앞으로는 시험을 위한 공부, 시험 끝나면 외운 것을 잊어버리는 그런 식의 공부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배우는 지식은 환자를 살리는데 필요한 지식이며 바로 자신을 위한 지식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모두 공감하였다.

나는 이어지는 학장의 인사말에 큰 감명을 받았다. 대학에서 학생들은 박동하는 심장의 해부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고통받는 환자의 심정을 똑같이 배워야 한다고, 그리고 대학교육이 끝날 즈음에는 머리와 가슴이 함께 움직이는 의사가 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두 시간가량 진행된 입학식의 절정은 ‘백색 가운 의식(White Coat Ceremony)’이었다. 신입생들은 반코트 길이의 흰 가운을 입고 학장을 따라 선서문을 한목소리로 읽어나갔다. “나는 환자와 가족의 계급, 종교, 사회·경제적 상황, 나이,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항상 연민과 존경심을 가지고 그들을 대할 것이며…”

인터넷에서 찾아본 자료에 의하면, 백색 가운 의식은 1989년 시카고 대학의 의대에서 최초로 행해졌다. 지금은 의대뿐 아니라 거의 모든 의료계통에서 거행하는 의식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학교에 따라 입학식 또는 졸업식장에서 거행하기도 한다. 이 의식은 의사들이 100년 이상의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흰 가운을 착용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성직자들의 서품식에 견주기도 하는데 의료 전문인의 길로 들어서면서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는 서약인 것이다.

지금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 백색 가운 의식이 행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 의식이 환자와 의료인을 나누고 학생들에게 우월감을 조장하는 부정적 역할을 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선서에 앞서 학장은 이 흰 가운이 친절, 존경과 순수한 사랑의 상징이며 의대에서 배우는 지식은 알려진 지식, 알아야 할 지식의 극히 작은 부분이어서 가운 색이 하얗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겸손하라고 당부하였다.

나는 따뜻해지는 가슴과 깊은 감동 속에 이 특별한 입학식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파탄의대 객원 교수·전남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