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 뜰앞 감나무엔 붉은 까치밥 한 개가 마지막 한 장 남은 달력처럼 걸려 있습니다. 밤사이에 폭설이 내린 도량은 온통 은빛 세계입니다. 올해 들어 가장 추운 한파라고 합니다. 하지만, 몸의 감각을 여실히 살피니 한 덩어리 불꽃이 화로처럼 붉게 타오릅니다. 일체 대상을 돌이켜 하나의 은빛세계로 만들고 추위가 본래 없는 저 무욕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수행자의 겨울 안거(安居)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시끄럽습니다. 하지만, 끝없이 일어나는 시비를 돌이키면 어느덧 한 가지 색깔로 만들어지는 은빛세계를 이루고 흔적없이 사라집니다. 이렇게 하루를 살고 어느덧 한 해를 보내면 사계절 언제나 좋은 날이 될 것입니다.

동지(오는 22일)가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절 마다 새해 달력을 나누며 한해를 무사히 보내고 광명의 새해를 맞이하는 기도가 한창입니다. 조사 스님의 말씀에 ‘익은 것은 설게 하고 설은 것은 익게 하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세월은 참으로 무상하여 화살처럼 빠르고 지나간 시간은 늘 아쉽기만 합니다. 오래 묵어 익은 습관들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길들인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묵은 악습을 버리는 것이지 새로이 얻는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조상님들은 동지를 맞아 오래 묵은 습관, 우울증과 같은 어두운 기운들을 벼랑 끝에 몰아세웠습니다. 그리고 붉은 팥죽을 뿌려 쫓아내는 벽사의식(귀신을 물리치는 의식)을 통해서 한해를 마무리했습니다.

수행자는 번뇌가 일어나면 바로 알아차린 뒤에 본래 청정한 성품으로 회광반조(回光返照·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춘다) 하였습니다. 그러면 참마음이라는 용광로가 드러나는데 여기에 일체 묵은 습관들을 녹여내고, 새해와 묵은 해의 분별을 내려놓아 언제나 호시절을 누렸습니다.

어제는 한때 치열하게 수련회를 이끌며 수행했던 섬에 다녀왔습니다. 모처럼 몽돌 해변을 한가롭게 거닐다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해조음(海潮音)을 듣노라니 지난 시절이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밀려갑니다. 해조음은 어머니의 자장가처럼 세상의 갈등과 아픔을 치료해 줍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은 해조음이 들리는 바닷가에 상주하며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고 달려가서 어루만지는 자비행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세월호 참사라는 큰 아픔이 있어 모두가 참으로 어렵고 힘든 한해였습니다. 그동안 익은 습관과 낡은 관행이 만들어낸 결과였으니 모두가 한 몸이라는 대자비심을 내어 매사에 살얼음을 밟듯이 해야겠습니다. 새해에는 바닷길이 더욱 순조로워 아무 탈이 없기를 발원해 봅니다.

내년은 을미년 푸른 양의 해라고 합니다. 푸른색은 진취적이고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양은 성질이 온순하여 무리를 지어 사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양띠해의 사람은 단체생활에서 성실하고 화합하는 성향이 강하다고 합니다.

한편, 양은 신을 위한 제물로 쓰였던 동물로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몸을 버린 숭고한 희생정신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세상살이는 주고 받는 행위를 통해서 은혜와 원한 두 축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 은혜로운 관계가 원한으로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나와 너가 둘이 아니라는 성인의 가르침을 믿어야 합니다.

새해는 순한 양처럼 절대 사랑과 헌신의 보살행을 통해서 세상의 아픔과 하나가 되도록 더욱 정진할 것을 다짐하면서 한해를 마무리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