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 후 아내와 갈등으로 고통 받는 지인의 이야기다. 지난 겨울 90이 넘은 노모를 뵙기 위해 찬바람 부는 시골 길 10여 리를 혼자 걸어 다녀오느라 한기가 들어서 누워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노인복지관에 가서 문 닫는 시간까지 있다가 오라”는 아내의 투정에 못 이겨 복지관에서 어정거리며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일찍이 일본에서 유행했던 ‘은퇴남편 증후군’이 우리 곁에 와 있음을 본다.

‘은퇴남편 증후군’이란 1990년대 초 일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은퇴한 남편 때문에 아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몸이 아프고 신경이 예민해지는 증상을 말한다. 60∼70년대 고도성장시대 ‘일벌레’였던 일본의 남편들이 은퇴와 동시에 이혼을 당하기 시작했다. 당시 퇴직 후 아내를 졸졸 따라다니는 남편을 ‘비에 젖은 낙엽’에 비유했다. 빗자루로 쓸려고 해도 쓸리지 않는 귀찮은 존재에 빗댄 말이다.

시도 때도 없이 “당신이 없으면 제발 좋겠다.”라며 황혼이혼을 채근하는 아내의 푸념 소리를 듣고 사는 지인을 생각하면 ‘동물의 왕국’이란 다큐멘터리가 떠오른다. 표범이나 하이에나와 같은 적으로부터 평생 무리를 보호하던 풍채 좋던 수사자는 늙고 힘이 빠지면서 젊은 수컷에게 자리를 내주고 쫓겨난다. 사냥할 힘도 없는 수사자는 혼자 헤매다 결국 굶어 죽고 만다. 늘그막에 버림받는 남편들이 그 꼴이 아닐까 싶다.

일 중심으로 살았던 사람일수록 은퇴 후 겪는 혼란의 정도는 더욱 커진다고 한다. ‘일 놓자 숨 놓는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은퇴 후 1년 사이에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는 사람들을 흔히 본다. ‘남성이 노후에 행복한 삶을 살려면 첫째 마누라, 둘째 아내, 셋째 와이프가 있어야 한다는 농담도 있다. 여자 중심으로 살지 않으면 편안한 노후를 보장할 수 없다는 소리처럼 들린다.

‘2014 사법연감’에 따르면 황혼 이혼율이 신혼 이혼율을 앞질렀다. 새로 결혼하는 사람은 줄어드는데 황혼이혼이 늘어났기 때문이라 한다. 미래에 받게 될 퇴직금과 퇴직연금까지도 이혼 시 재산분할 대상이 된다는 작년 7월 대법원 판례까지 나온 마당이다. 앞으로 황혼이혼 소송이 더욱 증가할 것이란 전망이다.

장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평균수명이 짧던 시절에는 황혼이혼은 생각지도 못했다. 물론 이혼이란 부부관계에서 누적된 갈등의 결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최근 황혼이혼 증가 원인 중의 하나가 ‘100세 시대’ 수명 연장의 결과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장수 만세’가 ‘장수 재앙’이 되는 현실이 매우 곤혹스럽고 혼란스럽다.

‘노후를 따뜻하게 지내려면 젊은 시절에 난로를 만들어 놓아야 한다.’라는 독일 속담이 와 닿는 요즘이다. 젊어서 자식 키우는 데만 열중했지, 부부간 결속과 사랑을 다지는 데는 소홀히 해온 결과가 아닐까 싶다. 남편들의 변화가 없다면 황혼이혼은 막을 수 없는 물결로 다가올 것이다. 혼자 사는 노인들이 치매에 걸릴 위험도 훨씬 크다고 하지 않는가.

이제 황혼이혼의 위기를 피해 갈 수 있는 지혜를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사막에서 차가 빠져나오려면 타이어의 바람을 빼듯 부부 갈등의 사막에서 나오려면 자존심이라는 바람부터 빼야 한다. 남자가 먼저 과거의 권위와 아집을 내려놓고, 부부가 공평해지는 것에서부터 장수시대 부부갈등의 해결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