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양장점〈본보 5월 20일자 도미패션하우스〉을 취재하고 났더니, 오래된 양복점이 궁금해졌다. 자료를 통해 찾은 광주극장 옆 태창라사는 어느 새 금은방으로 바뀌어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면 사라지는 게 바로 이런 오래된 가게다.

양복점은 흔히 ‘라사’(羅紗)로 불린다. 포루투갈어 ‘raxa’에서 유래한 말로 양털이나 무명, 명주 등을 섞어서 짠 두꺼운 모직물을 가르키는 말이라고 한다.

광주에 양복점이 등장한 건 1920년대 초로 알려져 있다. 충장로 1가에 일본인이 문을 연 와다나베 양복점이 가장 먼저고 비슷한 시기에 러시아 양복점도 문을 열었다.(박선홍 저 ‘광주 100년’) 해방 후 광주 충장로 일대를 중심으로 양복점이 많이 생겨났다. 대흥·중앙·파리 양복점 등이 대표적이다. 한창 때 충장로 일대에는 300여개가 넘는 양복점이 성업했지만 아직까지 영업을 하고 있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광주 충장로 4가에 위치한 유성양복점은 양복 인생 50년을 넘긴 김대용(70)씨의 삶이 녹아 있는 곳이다. 훤칠한 키에 직접 만든 와이셔츠와 양복을 입고 기자를 맞은 김씨는 ‘멋쟁이 신사’였다. “명색이 양복 디자이너인데 잘 갖춰 입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그에게선 한길을 걸어온 이가 갖고 있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김씨는 자신을 ‘오리지널 기술자’ 출신이라고 했다. 김씨가 처음 양복 기술을 접한 게 17살 때였다. 공부에 뜻이 있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당시 잘 나가던 한성라사가 첫 직장이었다. 수년간 기술을 익힌 김씨는 이후 십자옥 양복점, 대흥양복점, 코코양복점 등 충장로 유명 양복점에서 재단사로 일하며 실력을 쌓아나갔다.

처음 자신의 가게를 가진 건 1970년대 초반. 낮에는 시내 양복점 재단사로 일하고, 저녁에는 월산동에 문을 연 ‘코코 복장사’에서 옷을 만들었다. 옛 한국은행 옆에 현재의 유성양복점이라는 상호로 문을 연 건 1970년대 중반이다. 몇년 후 현재 충장로파출소앞 중앙로가 뚫리면서 가게가 철거됐고,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35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맞춤옷은 오직 ‘손’으로 하는 수작업이다. 주머니 등 몇군데를 제외하고는 지금도 처음부터 끝까지 수작업으로 옷을 만든다. 양복 상의 한벌을 만드는 데 하루 8시간씩 꼬박 이틀이 걸린다.

1960년대에는 검은색 등 염색 기술이 좋은 일본 옷감을 많이 사용했다. 골덴텍스로 유명한 제일모직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인기있는 브랜드다. 1980년대까지는 양복 수요층이 워낙 많아 다양한 옷감이 사용됐다. 울과 나이론이 혼합된 혼방지는 옷맵시가 나지는 않았지만 가격 경쟁력이 있는데다 질기고 실용적이어서 인기가 많았다.

대기업이 기성복 시장에 뛰어들면서 양복점은 사양길로 접어든다. 유성양복점 역시 한창 잘 나갈 때는 직접 운영하는 공장 기술자가 15∼20명에 달했다. 상의, 하의를 전문적으로 짓는 기술자가 있었고 직접 재단을 하는 김씨를 돕는 재단 보조도 뒀다. 한달에 평균 100벌, 많을 때는 200벌까지도 만들었지만 요즘에는 2명의 기술자와 한달에 10∼15벌 정도를 만들고 있다.

“자기 공장을 갖는 건 기술자들의 자존심이었죠. 내 개성대로 내가 추구하는 ‘작품’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요즘에는 워낙 힘들다 보니 자기 공장 없이 양복점을 운영하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에는 성취감을 갖기 어렵죠.”

양복점이 사양길로 접어든 또 다른 이유는 기술자를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양복 짓는 기술은 바로 활용하기 어렵고 지난한 숙련 기간이 필요하다.

김씨가 양복 짓는 일을 시작할 때는 정말 힘들었다. 공장에 ‘꼬마’로 입사하면 다리미 전담이 된다. 전기 다리미가 없던 시절, 지금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아이롱이라 불리는 숯다리미에 불을 달구는 일부터 시작한다.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 이후에 연탄불 화로 위에 다리미를 올리기 시작했고, 지금의 전기 다리미가 등장했다.

그 다음에 배우는 건 가봉 뜨는 것. 이어 바지, 조끼, 양복 상의 만드는 과정을 거친다. 이후 월급쟁이가 되거나, 한벌 당 돈을 받는 ‘와리’ 기술자로 일하다 양복점을 내는 경우가 많다.

“아마 제가 이런 과정을 모두 겪은 마지막 세대쯤이지 않을까 싶어요. 요즘 같은 세상에 젊은 사람들이 4∼5년씩 진득하게 일을 배우려 하지 않아요. 나이 들면 손의 근육이 굳어 옷을 만들기 힘들어집니다. 저도 서서히 은퇴를 고민해야할 시점인데 양복점을 이을 사람이 없다는 게 참 아쉽죠.”

유성양복점은 90% 정도가 단골 고객이다. 옷을 팔고 사는 관계를 떠나 인간적으로 맺어진 이들이다. 자신의 결혼식 때 예복을 맞춰갔던 손님이 결혼을 앞둔 아들과 다시 찾아와 결혼식 때 함께 입을 옷을 맞춰갈 때면 감회가 새롭다. 나이 칠십이 넘어서도 기념삼아 결혼예복을 옷장에 걸어두고 있다는 손님도 있다. 학교 교사들은 가장 큰 고객이었다. 당시에는 일시불로 옷을 맞추기 어렵다보니 할부로 구매하고 월급날이면 나눠 갚곤 했다. 여성복에 비해 유행의 민감도는 덜하지만 양복 역시 트렌드가 바뀐다.

“어떤 분들은 저희들보다 패션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경우도 있어요. 대부분 고객들은 단추 갯수나 앞트임, 뒷트임 정도의 변화만을 이야기하지만 전체적인 실루엣을 보면 양복도 변화가 참 많죠. 깃, 어깨 모양, 허리선, 기장 길이 등 미세하게 달라지는 부분이 많아요. 보통 5년 주기, 빠르면 3년 주기로 변화합니다. 양복지, 컬러 등도 많이 바뀌구요.”

김씨는 맞춤옷은 예술품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제작한 양복을 ‘작품’이라고 부른다.

“기성복이 몸을 옷에 맞추는 거라면 맞춤양복은 몸에 딱 맞는 옷을 연출하는 겁니다. 작품을 만드는 거죠. 50년 넘게 직업을 바꾸거나 외도하지 않고 한평생을 이 업에 종사한 것에 자부심을 느껴요. 후회하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해 본적도 없습니다. 내가 해 온 업에 대한 자부심, 자존심 하나로 버텨왔거든요. 지금까지도 제가 양복을 만들고 있는 건 늘 함께 해온 선후배, 동료들의 덕입니다. 양복업계가 힘들다고는 하지만 후배들이 잘 할거라 생각합니다.”

김씨는 지금은 세상을 떠난 대흥양복점의 김백운 사장을 비롯해 사명감을 갖고 ‘맞춤옷’을 함께 만들어온 이들에게 꼭 감사의 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더불어 오랜 시간을 함께 버텨온 가족들에게도.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