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서재 정리를 했다. 누렇게 바랜 책 냄새를 역겨워하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서다.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는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기회다 싶었다. 그런데 쉽게 생각했던 작업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어느 책을 버려야 하는가. 언젠가 그 책이 다시 필요해지는 것은 아닐까. 저자가 직접 사인까지 하여 정성껏 보내준 책들을 쉽게 버릴 수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앞섰다.

이사 때마다 책을 버린다고 버려왔는데도 아직 방안이 가득하다. ‘월간문학’, ‘한국수필’을 비롯한 각종 월간지와 회원들의 작품집, 통일 및 사진 관련 책자들로 넘쳐난다. 평소에 서가에 들여놓지 못한 책들은 바닥에 두기 마련이다. 얼마 안 가 방바닥 여기저기 책이 쌓여간다. 청소 때마다 아내의 따가운 눈총을 견뎌야 한다.

고사성어에 한우충동(汗牛充棟)이란 말이 있다. 수레를 끄는 소가 땀을 흘리고, 대들보까지 닿을 정도로 책이 많음을 이른 말이다. 책이 많아 높이 쌓아두지만 쓸모없는 책이 많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서재를 정리하다 보니 몇 년 동안 거들떠보지도 않거나 버려도 될 만한 책이 줄잡아 500권이 넘는다.

오래된 상자 하나를 열었더니 정말 가관이다. 초등학교 시절 일기장에서부터 월남 참전 메모장, 초임교사 시절 수업준비물 등 메케한 냄새와 함께 다양한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 꼼꼼한 성격에 수집벽이 강한 탓이다. 혹시나 하여 버리지 못한 것들이다. 하지만 역시 다시 읽을 기회가 없어 상자 속에 잠들어 있던 것들이 아닌가.

서재 한편에 버려질 책들, 구입 장소와 일자가 적힌 것을 보면 한 권 한 권 이런저런 사연들이 가득하다. 차곡차곡 추억들을 밖으로 내놓는다. ‘새 세대의 진로’란 책은 가난에 찌들어 배고픈 고교 시절 감명 깊은 책 중의 하나다. 각계 명사들이 젊은이에게 주는 주옥같은 교훈이었다. 모두 내가 살아온 일생의 발자취라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이런 것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지 않았나 싶다.

그동안 책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화도 여러 가지다. 평소에 내가 투고했던 글들이 실린 신문과 잡지만을 따로 소중히 모아둔 상자 하나가 있었다. 10여 년 전 전근을 가는 길, 이삿짐을 싸는 과정에서 아내가 실수로 그 상자를 쓰레기통에 버린 것이다. 이틀이 지난 후에야 버린 것을 알고 발을 동동 구른 적이 있다.

한 번은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를 오던 날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읽지 않는 전집류를 아파트 입구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그날 저녁 나이 지긋한 은퇴한 목사님이 책 에서 나온 것이라며 만 원짜리 지폐 10장을 가지고 물어물어 찾아온 기억도 새롭다.

책 정리 과정에서 필요한 책을 다시 발견한 기쁨도 있었고, 이런 걸 왜 싸안고 있었을까 싶은 책도 있었다. 당장 필요 없는 책 중에서도 폐기할 것과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할 책으로 구분하였다. 교육에 관한 책들은 고교 교사인 며느리에게 주려고 따로 묶어두었다. 이렇게 정리하다 보니 바닥까지 책으로 빼곡하던 방이 개운해졌다. 진종일 땀을 흘린 보람이다.

쓸모없는 물건을 버리는 것이 낭비가 아니라 계속 보관하고 있는 것이 낭비라고 하지 않던가. 서재란 학식과 사유의 깊이를 과시하는 장소가 아니다. 돌이켜보면 읽지도 않는 제법 그럴듯한 책들을 잔뜩 쌓아놓고 이사할 때마다 큰 고생을 했던 지난 일들이 어리석기 짝이 없다.

말끔해진 서가를 보니 좀 더 일찍 정리를 해야 했을 것을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버리지 못하고 붙들고 있었던 것은 결국 욕심이었다. 가뿐한 마음으로 책을 버리니 욕심도 사라졌다. 그 공간에 마음의 여유가 생겨난 것이리라. 인생이란 비우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