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임에서 보길도 답사를 간 적이 있었다. 마침 그때가 테러방지법 제정 방지를 위한 필리버스터가 진행되고 있어서 우린 여행지에서 TV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정치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겠다며 입이 마르는 야당의원들의 모습에서 시대는 다르지만 조정을 향해 수없이 상소를 올리고 문제를 제기한 고산 윤선도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고산은 송강 정철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시가문학의 최고봉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정치인으로서 그의 생애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상소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굽힐 줄 모르는 생을 살다간 정치투사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고산에 대한 수많은 기록 중 호의적인 평가는 많지 않다. 그것은 고산의 일부 행적과 공격적인 상소들이 빌미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무려 37년에 달하는 유배와 은둔생활을 할 정도의 중죄는 아니라고 볼 때 그만큼 정적들의 시기와 모함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절대 소신을 굽히지 않고 할 말 다하는 꼿꼿한 그를 어떻게든 가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고산은 광해군 집권초기 갓 서른의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병진소(丙辰疏)를 올려 중앙정계에 입문한다. 상소내용은 감히 엄두를 못 낼만큼 매섭고 직설적이었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이이첨의 전횡을 고발하고 이이첨과 그 일당을 내쳐야한다며 과거제도의 폐해 등을 적나라하게 지적한 것이었다. 고산은 이 한 장의 상소로 정계에 회오리를 일으키며 일약 유명인사가 되지만 그 대가는 너무 혹독했다. 이이첨 일당의 반격으로 무려 7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당이 축출되자 복권되어 42세에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세자사부를 지내기도 했지만 정적들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중도하차하게 된다. 그의 승진을 시기하는 중신들의 모함으로 사헌부지평에서 성산현감으로 좌천된 뒤 좌절을 거듭하다 해남으로 낙향하여 은둔생활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66세 때에 의외로 제자였던 봉림대군이 효종이 되자 그의 부름으로 17년간의 은둔생활을 접고 화려하게 정치무대로 복귀한다. 그러나 반대세력은 그때도 여전하여 효종의 엄호 속에서도 불과 4년 만에 정계를 떠나 낙향하게 된다.

고산의 정치생활은 칠십이 넘어서도 계속된다. 또다시 효종의 부름을 받아 동부승지까지 올랐으나 그의 운명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고산은 정적들의 질시에 못 이겨 1년에 무려 13번의 사직상소를 올리고 자리에서 물러난다. 해남에 있는 녹우당 사랑채는 효종이 정계를 떠나는 고산을 위해 하사했던 집으로 원래 화성에 있었으나 고산이 해남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그리고 1년 뒤 든든한 후원자였던 효종이 죽자 송시열(宋時烈)이 이끄는 서인과의 예송논쟁에서 패해 또 다시 함경도 삼수(三水)로 7년간의 유배를 가게 된 것이다. 결국 고산은 80이 넘어서야 고난의 정치무대를 떠나 보길도에서 85세를 일기로 잠이 든다.

효종실록에 나오는 그의 평에 “이 사람은 미조지계(媚 之計-교묘하게 아첨하는 계책)을 알지 못 한다” 라거나 “이 사람은 직설적인 말로 홀로 싸우기를 좋아 한다”라는 것을 보면 고산의 성품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고산의 삶을 살펴보면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이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요즘 말로 금수저를 물고 난 고산의 신분으로 시대와 타협하며 평탄한 삶을 살 수 있었음에도 굽힘이 없이 불의를 고발하고 정쟁의 중심에 선 그를 보면 진정 용기 있고 소신 있는 정치투사였음을 알 수 있다.

요즘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배신의 정치인으로 찍혀 결국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된 어느 정치인에 얽힌 촌극을 보면서 만약 고산이 이처럼 무원칙이 난무한 시대에 살고 있다면 어떤 내용의 상소를 올릴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