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사태로 인해 온 나라가 분노로 들끓는 상황에서, 최근 미국 법원에서 이와 유사한 사안에 가해기업의 책임을 엄중하게 물은 판결을 선고해 화제가 되고 있다. 발암물질이 함유된 존슨앤드존슨의 제품을 사용해 난소암에 걸린 여성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5500만 달러, 한화로 약 627억원에 이르는 거액을 배상하라고 결정한 것이다.

미국의 경우 징벌적 손해배상, 즉 민사재판에서 가해자의 행위가 악의적이고 반사회적일 경우 피해자에게 입증된 재산상 손해보다 훨씬 많은 금액의 배상을 하도록 하는 일종의 처벌적 배상제도가 존재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변론주의라는 대원칙 하에 대심적 구조로 진행되는 민사소송의 특성상, 소를 제기하는 원고는 법원에 사실을 주장하고 이에 대한 증거를 제시할 책임을 부담하게 되고, 이는 일반적인 손해배상 청구소송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피해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우선 가해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가해행위가 있었음을 입증해야 하고, 이로 인해 자신이 입은 손해의 정도를 입증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입은 손해가 가해행위로 인한 것이라는 점까지 입증해야 한다.

가습기 살균제 사태와 같이 기업이 제조한 제조물로 인한 손해의 경우, 이러한 일반적인 손해배상 청구소송보다는 피해자의 입증책임이 다소 완화된다. 2002년 7월1일부터 시행하고 있는 제조물책임법을 통해, 제조물의 결함으로 인한 생명, 신체 또는 재산상의 손해에 대하여는 제조업자 등이 무과실책임의 원칙에 따라 손해배상 책임을 지도록 하는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경우에도, 일반적인 손해배상 청구소송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피해를 주장하는 측에서 가해자의 가해행위와 그로 인해 자신이 입은 손해, 그리고 그러한 자신이 입은 손해가 가해행위로 인한 것이라는 점까지 입증해야 한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피해자가 이러한 요건들을 입증해 소송에서 승소하더라도, 이로 인해 가해기업이 입게 될 경영상의 위험은 크지 않다는 데 있다. 가해기업이 배상해 주어야 할 금액은 피해자가 입은 실제 손해, 그 중에서도 입증이 가능한 부분에 한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업 입장에서는 경제적인 측면만을 고려한다면, 당연히 위험성이 존재하는 제품이라도 일단은 시판을 강행할 것이다. 현재의 제도하에서 제품의 결함으로 인한 피해자들이 입은 손해를 배상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은, 해당 제품에 대한 판매를 통해 기업이 얻은 수익에 비하면 큰 부담이 되지 않는 금액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도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의 도입을 고민할 때다. 소비자의 안전을 무시한 영리활동은 결국 기업의 존폐의 문제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지 않는다면,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안전불감증으로 인한 사고는 결국 불운한 개인의 문제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고, 기업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또 다른 독성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