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윤승희] 포레스트 검프처럼 달린다, 딸과 함께
2016년 06월 02일(목) 00:00 가가
‘딱 3년만’ 부모와의 약속에 한국 돌아갔지만
독일 생활 그리워 출국 … 운명의 남자 재회도
평범한 결혼생활도 잠시 … 장애인 딸에 올인
마흔에 무조건 달려 … 예순 생일땐 마라톤 완주
인생 개척해 가는 딸 오래 지켜보는게 소원
독일 생활 그리워 출국 … 운명의 남자 재회도
평범한 결혼생활도 잠시 … 장애인 딸에 올인
마흔에 무조건 달려 … 예순 생일땐 마라톤 완주
인생 개척해 가는 딸 오래 지켜보는게 소원


독일에서 간호사로 3년간 근무했던 윤승희씨는 고향 강진으로 돌아왔지만 귀국 전 독일에서 만난 남자를 잊지 못해 다시 독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현재의 독일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아들, 딸과 함께 단란한 포즈를 취한 윤승희씨.
아홉 번 꼬부라진 양의 창자보다 더 구불구불한 길도, 투명한 호수가 보이는 작은 오솔길도 그녀에겐 그저 벗이었다. 지난 기억의 무게가 어깨를 덮쳐 쓰러질 것 같아도 발걸음은 미풍보다 가벼웠다. 작지만 거인여자 윤승희는 그렇게 오늘 아침도 앞을 향해 달렸다. 타자(他者)들의 인식과 시선엔 아랑곳 하지 않고 그저 달릴 수 있는 것은, 내면에 꿈틀거리는 강한 모성애 때문이다. 처음엔 혈압 때문에 의사의 권고로 뛰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톰 행크스처럼 무조건 뛰었다. 그렇게 뛴 것이 열 번의 하프 마라톤과 60세 생일 기념으로 참여한 완주 마라톤을 이끌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점점 건강도 좋아졌고 딸 한나 때문에 마음이 힘들었던 것이 사라졌어요. 음…. 인생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구요.” 승희는 딸 이야기에 잠시 숨을 골랐다. 그녀의 마지막 말에서 톰 행크스의 명 대사가 다시 떠올랐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 같은 거예요. 어떤 초콜릿을 먹게 될지 모르니까. 뚜껑 열어 맛보기 전까지.’
1970년, 스무 살의 나이에 파독 간호사로 독일 땅을 밟은 윤승희(66).
강진에서 2남 3녀 중 맏딸로 태어나, 해남과 광주에서 자란 승희는 어릴 때부터 조숙했다. 집안 살림이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알았다.
열 아홉, 우연히 보게 된 신문에서 ‘파독 간호사’ 기사가 시선에 꽂혔다. 어려운 가정형편을 고려했고, 간호보조원 양성소를 홀로 찾아갔다. 간호 보조원 과정은 10개월이었다. 교육을 마친 후, 눈 딱 감고 3년만 독일에서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부모님은 만류했지만, 돈 벌고 오겠다는 큰 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부모님은 ‘딱, 3년이다’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승희의 독일생활 3년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별빛처럼 반짝였다. 먹을 거, 입을 거 시간까지 아껴가며 번 돈을 고국에 보낸 승희는, 젊은 날의 고생은 희망이라고 심장을 다독였다. 어느덧 3년이 다 되어 한국에 돌아가기 몇 달 전, 동료 간호사가 속삭였다.
“독일에 와서 디스코텍 한 번 안 가면 한국 돌아가서 억울할 거야, 라구요. 그날 밤 저의 운명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죠.”
승희는 클럽에 온 독일남자와 함께 춤을 추었고, 자연스레 남자에게서 에프터 신청을 받았다. 남자는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 승희를 본 순간 사랑을 직감했다.
한국에 돌아가 부모님의 권유로 여러 번 맞선을 보았다. 하지만 한국에서 남자들을 만날수록 독일인 그 남자가 자꾸만 떠올랐다. 게다가 독일에 돌아가 더 돈을 벌고 싶었다. 결국 승희는 독일로 돌아왔고, 운명의 남자와 재회했다. 당시 그는 베를린 공과대학 조교수로 일했다.
1977년에 결혼했고, 첫 아들을 낳게 되면서 간호사 일을 병행하기가 힘들었다. 당시 승희는 내과에서 근무했는데, 주로 나이든 어르신들이 많았다. 밤 근무할 때 덩치 큰 열 명 이상의 남자환자들을 씻어주고 나면 온 몸이 누군가에게 심하게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다. 체구가 작고 동작도 느린 그녀에게 버거운 일이었다.
80년에 남편이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일하게 되고, 점차 안정을 찾자 승희는 전업주부로 옷을 갈아입었다. 예쁜 딸아이를 낳은 후는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다. 물론 딸 아이가 두 살이 될 때까진 인식하지 못했지만…. 보통의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한나는 반응이 느리고 발육도 현저히 떨어졌다. 점차 절망감이 엄습했다.
“우리 딸 아이는 지금 스물 여덟인데 149㎝에 몸무게가 30㎏밖에 안 나가요. 항상 통통하게 살이라도 쪘으면 했어요.”
문득 ‘늙은 프린츠’라는 애칭을 가진 독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생각났다. 대왕은 독일에 처음으로 감자를 보급했던 독일 민초들의 아버지였다. 그가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리지아 여왕과의 7년 전쟁에서 승리한 후 오랜만에 만난 아내 엘리자베스 왕비에게 던진 한 마디는 “당신, 살이 좀 쪘구료.”였다. 살이라는 것은 가장 평범하고 체감적이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단어다. 그것은 지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윤승희는 딸을 위해 자신의 삶을 오롯이 바쳤다. 특수 초등학교를 다닌 딸은 자라면서 정상 아이들보다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딸 한나는 50% 장애 판정을 받았다. 먹는 것을 싫어해 신경을 써서 음식을 만들어도 도통 먹지를 못했다. 아이는 위궤양까지 얻었다. 아이가 음식 앞에서 고개를 저을 때면 모든 삶을 포기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어머니 승희는 강했고, 딸 한나는 점차 엄마의 눈물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그때부터 한나와 기나긴 인생의 경주가 시작됐다. 상급학교는 일반 아이들이 다니는 레알슐레(기술학교)를 보냈다. 체구가 작아 1년을 더 다니기도 했다. 한나는 상급학교를 졸업한 후 프리드리히 대왕의 별장이 있는 도시 포츠담에서 아우스빌둥(Ausbildung·직업교육)을 받았다.
“매일 숙제도 봐줘야 하고, 제 개인 삶은 없었죠. 그래도 우리 한나가 졸업식에서 상을 받을 때 눈물이 쏟아졌어요.”
한나는 1년은 준비직업 코스를, 3년은 사무실 양성교육을 마치고 지금은 장애인 단체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다. 총 450 여명의 직원이 있는 제법 큰 단체다. 한나는 이곳에서 각 부서에 우편물을 갖다주고 전화받는 일도 한다. 영수증 관리도 해야 하는데, ‘한나는 단어를 깜박깜박 잊곤 한다’고 승희는 슬쩍 웃었다.
지금의 승희는 행복하다. 40대부터 달리기를 시작해 벌써 20년이 넘어섰다. 이제는 아침마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딸과 함께 달리기를 한다. 어머니와 딸이 달리는 그 시간, 거리 주변은 마치 마술가루가 뿌려진 것처럼 고즈넉해진다.
승희는 환갑 기념으로 베를린 마라톤에도 참여했다. “그때 23㎞ 정도 뛰어가고 있는데, 내 앞에 한국 청년이 힘들어하면서 그냥 맥없이 걷드라고요. 내가 그 청년의 등을 밀면서 힘내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너무 힘들다고 뒤처지더군요.”
하지만 잠시 후 그 청년이 뛰어오더니 같이 뛰자고 했단다. 승희의 달리는 모습에 고무가 되어 힘을 내었고, 승희와 청년은 완주를 했다. 승희 말대로, 인생은 지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있다.
“가장 힘들었을 때요? 음 ……. 아버지가 83년에 어머니가 88년에 돌아가셨는데 두 분의 장례식에 못 갔어요. 한나도 그렇고, 제 상황도 여의치 않았고. 마지막을 보지 못해 한이 되더군요.”
승희의 소망은 단 한 가지다. 딸 한나가 자신의 생을 스스로 개척하는 것을 곁에서 오래 지켜볼 수 있길 바란다. 승희는 어느 비오는 아침, 생의 고뇌로 흘린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었던 때를 기억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찬란한 태양 속을 달린다. 그녀의 등 뒤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
kyou723@naver.com
1970년, 스무 살의 나이에 파독 간호사로 독일 땅을 밟은 윤승희(66).
열 아홉, 우연히 보게 된 신문에서 ‘파독 간호사’ 기사가 시선에 꽂혔다. 어려운 가정형편을 고려했고, 간호보조원 양성소를 홀로 찾아갔다. 간호 보조원 과정은 10개월이었다. 교육을 마친 후, 눈 딱 감고 3년만 독일에서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부모님은 만류했지만, 돈 벌고 오겠다는 큰 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부모님은 ‘딱, 3년이다’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독일에 와서 디스코텍 한 번 안 가면 한국 돌아가서 억울할 거야, 라구요. 그날 밤 저의 운명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죠.”
승희는 클럽에 온 독일남자와 함께 춤을 추었고, 자연스레 남자에게서 에프터 신청을 받았다. 남자는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 승희를 본 순간 사랑을 직감했다.
한국에 돌아가 부모님의 권유로 여러 번 맞선을 보았다. 하지만 한국에서 남자들을 만날수록 독일인 그 남자가 자꾸만 떠올랐다. 게다가 독일에 돌아가 더 돈을 벌고 싶었다. 결국 승희는 독일로 돌아왔고, 운명의 남자와 재회했다. 당시 그는 베를린 공과대학 조교수로 일했다.
1977년에 결혼했고, 첫 아들을 낳게 되면서 간호사 일을 병행하기가 힘들었다. 당시 승희는 내과에서 근무했는데, 주로 나이든 어르신들이 많았다. 밤 근무할 때 덩치 큰 열 명 이상의 남자환자들을 씻어주고 나면 온 몸이 누군가에게 심하게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다. 체구가 작고 동작도 느린 그녀에게 버거운 일이었다.
80년에 남편이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일하게 되고, 점차 안정을 찾자 승희는 전업주부로 옷을 갈아입었다. 예쁜 딸아이를 낳은 후는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다. 물론 딸 아이가 두 살이 될 때까진 인식하지 못했지만…. 보통의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한나는 반응이 느리고 발육도 현저히 떨어졌다. 점차 절망감이 엄습했다.
“우리 딸 아이는 지금 스물 여덟인데 149㎝에 몸무게가 30㎏밖에 안 나가요. 항상 통통하게 살이라도 쪘으면 했어요.”
문득 ‘늙은 프린츠’라는 애칭을 가진 독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생각났다. 대왕은 독일에 처음으로 감자를 보급했던 독일 민초들의 아버지였다. 그가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리지아 여왕과의 7년 전쟁에서 승리한 후 오랜만에 만난 아내 엘리자베스 왕비에게 던진 한 마디는 “당신, 살이 좀 쪘구료.”였다. 살이라는 것은 가장 평범하고 체감적이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단어다. 그것은 지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윤승희는 딸을 위해 자신의 삶을 오롯이 바쳤다. 특수 초등학교를 다닌 딸은 자라면서 정상 아이들보다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딸 한나는 50% 장애 판정을 받았다. 먹는 것을 싫어해 신경을 써서 음식을 만들어도 도통 먹지를 못했다. 아이는 위궤양까지 얻었다. 아이가 음식 앞에서 고개를 저을 때면 모든 삶을 포기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어머니 승희는 강했고, 딸 한나는 점차 엄마의 눈물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그때부터 한나와 기나긴 인생의 경주가 시작됐다. 상급학교는 일반 아이들이 다니는 레알슐레(기술학교)를 보냈다. 체구가 작아 1년을 더 다니기도 했다. 한나는 상급학교를 졸업한 후 프리드리히 대왕의 별장이 있는 도시 포츠담에서 아우스빌둥(Ausbildung·직업교육)을 받았다.
“매일 숙제도 봐줘야 하고, 제 개인 삶은 없었죠. 그래도 우리 한나가 졸업식에서 상을 받을 때 눈물이 쏟아졌어요.”
한나는 1년은 준비직업 코스를, 3년은 사무실 양성교육을 마치고 지금은 장애인 단체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다. 총 450 여명의 직원이 있는 제법 큰 단체다. 한나는 이곳에서 각 부서에 우편물을 갖다주고 전화받는 일도 한다. 영수증 관리도 해야 하는데, ‘한나는 단어를 깜박깜박 잊곤 한다’고 승희는 슬쩍 웃었다.
지금의 승희는 행복하다. 40대부터 달리기를 시작해 벌써 20년이 넘어섰다. 이제는 아침마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딸과 함께 달리기를 한다. 어머니와 딸이 달리는 그 시간, 거리 주변은 마치 마술가루가 뿌려진 것처럼 고즈넉해진다.
승희는 환갑 기념으로 베를린 마라톤에도 참여했다. “그때 23㎞ 정도 뛰어가고 있는데, 내 앞에 한국 청년이 힘들어하면서 그냥 맥없이 걷드라고요. 내가 그 청년의 등을 밀면서 힘내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너무 힘들다고 뒤처지더군요.”
하지만 잠시 후 그 청년이 뛰어오더니 같이 뛰자고 했단다. 승희의 달리는 모습에 고무가 되어 힘을 내었고, 승희와 청년은 완주를 했다. 승희 말대로, 인생은 지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있다.
“가장 힘들었을 때요? 음 ……. 아버지가 83년에 어머니가 88년에 돌아가셨는데 두 분의 장례식에 못 갔어요. 한나도 그렇고, 제 상황도 여의치 않았고. 마지막을 보지 못해 한이 되더군요.”
승희의 소망은 단 한 가지다. 딸 한나가 자신의 생을 스스로 개척하는 것을 곁에서 오래 지켜볼 수 있길 바란다. 승희는 어느 비오는 아침, 생의 고뇌로 흘린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었던 때를 기억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찬란한 태양 속을 달린다. 그녀의 등 뒤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
kyou7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