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동아리 친구들과 혜화동 주교관을 찾아가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수환 추기경님을 뵌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추기경님의 첫 말씀은 “삶은 무엇일까요?”라는 짧은 질문이었습니다. 모두가 고민에 빠진 찰나 “삶은, 계란이지요.”라시며 허탈해하는 저희들을 향해 허허 웃어주시던 추기경님의 첫 인상은 참 맑고 따뜻했습니다.

당시 법대생이었던 저희들에게 추기경님은 우리가 흔히 ‘장발장’으로 알고 있는 소설, ‘레미제라블’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사랑이 없는 엄격한 법원칙주의자 자베르와 사랑을 실천한 탈주범 장발장의 삶을 이야기하시며 추기경님은 “부디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법조인이 되길 바랍니다.”라고 거듭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수년이 흘렀고 그동안 저는 몇몇 직역을 거쳐 현재는 이 곳 광주에서 지방법원 판사의 일원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추기경님의 말씀에 감동하던 풋풋했던 청년은 어느새 한 사람의 직업인이자 한 아내의 남편,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모든 직업에 힘든 점이 있겠지만 판사라는 직업은 특히 끝없는 판단이 요구되는 직업입니다. 민사재판의 경우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대립하는 주장 하나하나의 당부를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하고, 형사재판의 경우 유죄인지 무죄인지, 만약 유죄라면 어떠한 형을 선고하여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판단해야 합니다.

피고인의 인권이 있다면 그 이면에는 피고인에 의해 침해된 피해자의 인권이 있고, 그 사람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대한 판사의 인간적인 공감이 있다면 그 이면에는 판사에 의해 지켜져야만 하는 엄격한 법적 당위가 있습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 판사는 고뇌해야 합니다.

이렇게 판사의 판단을 기다리는 사건들이 매달 한 재판부 당 적게는 수십 건, 많게는 백여 건 이상 새롭게 쏟아져 들어옵니다. 외국에 비해 많은 수임에도 한 사건 한 사건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열심히 기록을 보고 재판을 하지만 판사 또한 사람인지라 때로는 실수를 하기도 있고 때로는 지치기도 합니다.

엄청난 지능의 컴퓨터가 인간 프로기사와의 바둑게임에서 승리하는 첨단의 시대에 부족한 인간에 불과한 저 같은 판사가 이렇게 꾸역꾸역 재판을 수행하고 있는 이유는, 엄격한 알고리즘의 결정체인 컴퓨터와 달리, 추기경님께서 십수년전 말씀하셨던 ‘장발장의 가슴’으로 고뇌할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알파고가 위세를 떨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광주·전남지역의 인간 판사들은 열심히 사건을 검토하고 때로는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최선을 다해 재판에 임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이들의 노력에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지요.

아직 독자 여러분들의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이러한 노력들이 계속 쌓이다 보면 언젠가 국민들이 법원의 재판을 온전히 신뢰하고 판사들도 국민들의 신뢰를 등에 업고 당당하게 재판에 임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법관’이라 불리며 지금도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고 김홍섭 판사님이 재판 당시 하셨던 말씀을 약간 각색하여 실음으로써, 부족한 한 인간 판사로서의 제 변명에 갈음하고자 합니다.

“저 역시 한계를 지닌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이와 같은 판결을 내리게 되어 무척이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제 판결이 곧 진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주어진 절차와 증거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사건을 검토하고 인간의 가슴으로 고뇌하여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제 판결에 불만이 있으시더라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의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