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구의 中國 인물 이야기 <47>혜제의 황후 가남풍
2016년 09월 06일(화) 00:00 가가
사치·음란 악명 떨치다 비극적 최후
가남풍(賈南風, 257-300)은 사마염이 세운 서진의 2대 황제 혜제의 황후다. 위·진 정권의 실력자인 가규의 손녀이고 가충의 딸로 많은 왕족과 대신을 죽이는 등 전횡을 일삼다가 폐위되고 죽임을 당하였다.
그녀는 키가 작고 피부도 검고 용모가 추했다고 한다. 무제 사마염은 태자인 사마충의 배필감으로 중신 위관의 여식을 은근히 마음에 두었다. 그러나 황후와 대신들이 가씨 집안의 뇌물공세에 넘어가 가충의 여식을 태자비로 간택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무제는 가씨 집안과 혼사를 맺게 되었다. 당초에는 가충의 여식 중 제일 인물이 뛰어난 가오를 시집보내려 했으나 발육이 늦어 부득이 15세가 된 가남풍을 황실에 보냈다고 한다. 그녀는 아버지 가충 덕에 태자비가 되었다. 그는 사마소의 반위 쿠데타의 일등 공신으로 사마씨 정권이 수립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무제가 동생 사마유 대신 아들 사마충을 태자로 삼은 것도 가충의 영향이 컸다.
그녀는 성정이 잔인해 사마충의 다른 후궁들을 잔혹하게 죽였다. 무제는 이에 크게 진노해 그녀를 유폐시키려 했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사마충은 일찍부터 아둔하고 학문에 뜻이 없었다. 이를 걱정한 무제는 궁녀인 사구를 태자에게 후궁으로 보내 황손 사마휼을 낳았다. 어느날 한밤중에 궁중에 화재가 났는데 무제가 망루에 올라가 멀리서 바라보았다. 다섯 살인 사마휼은 황제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어두운 곳으로 이끌며 “늦은 밤 급박한 상황입니다. 마땅히 비상시에 대비해 불빛이 군주를 비춰 다른 사람에게 보이게 해서는 안됩니다”고 말하였다. 무제는 황손이 선제인 사마의와 비슷하다며 칭찬하였다. 태자가 재주가 없었으나 황손의 명석함과 지혜를 믿어 태자를 폐립하지 않았다.
머리가 좋고 지략이 뛰어난 그녀 덕에 남편 사마충이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사마충은 백치 태자로 지칭되어 무제의 근심이 많았다. 중신 위관은 어느날 능운대에서 벌어진 연회에서 옥좌를 만지며 “이 자리는 태자에게 너무 과분하다”고 태자 문제를 재고할 것을 건의했다. 무제는 황태자를 시험하기로 했다. 태자가 시험지를 받자 그녀는 다른 사람이 대신 쓰되 지나치게 뛰어난 문장은 피하고 중요한 요점만을 밝히도록 했다. 시험지를 받아본 무제는 “이 정도면 천자의 지위는 감당하겠군”이라 말하고 더 이상 폐위 문제를 거론치 않았다.
혜제 즉위 후 그녀는 매번 정사에 간섭하려 하였다. 그러나 번번히 태부 양준에게 견제당하자 양준이 역모를 꾸몄다고 모함해 양준을 죽이고 황후를 폐위시켰다. 그녀는 친정오빠 가모와 혜제 동생 초왕 사마위를 부추겨 양준을 기습해 죽였다. 양준의 처인 방씨를 살리기 위해 양태후는 자신을 ‘첩’이라고 칭하면서 애원했으나 결국에는 처형됐다. 이때 수천명이 궁중 쿠데타로 주살되었다고 한다. 혜제는 여남왕 사마량과 위관을 불러 정권을 맡겼으나 그녀는 사마위를 꼬드겨 그들을 죽였다. 사마위도 죽이고 장화를 재상으로 삼았다.
권력을 틀어쥔 그녀의 가장 큰 근심거리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임신했다고 거짓 소문을 내고 여동생 가오가 낳은 아들을 자기가 낳은 아들이라고 했다. 사구가 나은 사마휼을 죽이고 데려온 아들을 태자로 세웠다. 그녀는 사마훌을 죽이기 위해 약을 먹이고 황제와 황후를 죽이겠다는 글을 강제로 쓰게 했다. 결국 폐서인으로 강등되고 태의령 정거가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그녀의 사치와 음란이 도를 넘어섰다. 태의령 정거와 정을 통하더니 이후에는 잘생긴 소년을 보면 길에서 납치해 궁중으로 데려와 정을 통한 연후 죽여 버리곤 했다. 황태자 사마휼을 죽인 일과 그녀의 계속된 음란행위에 사마씨 왕족이 들고 일어났다. 일족의 원로인 조왕 사마율이 궁중으로 들어와 혜제를 감금하고 그녀를 체포했다. 그녀는 금용성에 유폐되어 독주인 금설주를 마시고 사사됐다. 강의잔인(剛毅殘忍)한 면에서 그녀는 전한의 여태후, 당의 무측천, 청의 서태후에 비견된다. 그러나 음란한 점에서는 중국 역대 황후 중 으뜸일 것이다.
그녀는 키가 작고 피부도 검고 용모가 추했다고 한다. 무제 사마염은 태자인 사마충의 배필감으로 중신 위관의 여식을 은근히 마음에 두었다. 그러나 황후와 대신들이 가씨 집안의 뇌물공세에 넘어가 가충의 여식을 태자비로 간택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무제는 가씨 집안과 혼사를 맺게 되었다. 당초에는 가충의 여식 중 제일 인물이 뛰어난 가오를 시집보내려 했으나 발육이 늦어 부득이 15세가 된 가남풍을 황실에 보냈다고 한다. 그녀는 아버지 가충 덕에 태자비가 되었다. 그는 사마소의 반위 쿠데타의 일등 공신으로 사마씨 정권이 수립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무제가 동생 사마유 대신 아들 사마충을 태자로 삼은 것도 가충의 영향이 컸다.
권력을 틀어쥔 그녀의 가장 큰 근심거리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임신했다고 거짓 소문을 내고 여동생 가오가 낳은 아들을 자기가 낳은 아들이라고 했다. 사구가 나은 사마휼을 죽이고 데려온 아들을 태자로 세웠다. 그녀는 사마훌을 죽이기 위해 약을 먹이고 황제와 황후를 죽이겠다는 글을 강제로 쓰게 했다. 결국 폐서인으로 강등되고 태의령 정거가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그녀의 사치와 음란이 도를 넘어섰다. 태의령 정거와 정을 통하더니 이후에는 잘생긴 소년을 보면 길에서 납치해 궁중으로 데려와 정을 통한 연후 죽여 버리곤 했다. 황태자 사마휼을 죽인 일과 그녀의 계속된 음란행위에 사마씨 왕족이 들고 일어났다. 일족의 원로인 조왕 사마율이 궁중으로 들어와 혜제를 감금하고 그녀를 체포했다. 그녀는 금용성에 유폐되어 독주인 금설주를 마시고 사사됐다. 강의잔인(剛毅殘忍)한 면에서 그녀는 전한의 여태후, 당의 무측천, 청의 서태후에 비견된다. 그러나 음란한 점에서는 중국 역대 황후 중 으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