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대선을 앞두고 이른바 ‘잠룡’(潛龍)들의 물밑 움직임이 활발하다. ‘잠룡’이란 ‘주역’ 건괘(乾卦)에 나오는 말로, 성인(聖人)이 때를 만나지 못하여 물속에 숨어 있는 것을 가리킨다. 이 잠룡이 ‘현룡’(見龍)의 단계를 거쳐 하늘을 나는 ‘비룡’(飛龍)이 되면 성인이 천자의 지위를 얻어 천하가 잘 다스려지게 된다.

그러나 대선 경쟁에 뛰어든 이들을 과연 ‘잠룡’이라 불러야 할지 의문이다. 잠룡이라 부를 수 있으려면 이들이 성인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현룡도 되고 비룡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용은 신령스러운 동물이다. 그러기에 성인을 용에 비유한 것이다. 지금 대선 경쟁을 펼치고 있는 이들에게 용의 칭호를 붙여 주기가 조심스러운 것은 이들 개개인의 인격과 능력을 검증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권에 대한 일반인의 강한 불신 때문이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 기관의 통계에 의하면 직업별 신뢰도에서 정치인이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정치인 하면 떠오르는 것이 거짓말, 뻔뻔함, 싸움질, 탐욕… 이런 말들이다. 오죽했으면 ‘정치가는 교도소 담장 위를 걸어가는 사람’이라는 농담까지 나왔을까. 걸어가다가 자칫하면 교도소 안으로 떨어진다. 그러므로 정치가는 범죄자와 일반인의 경계선에 있는 자라는 말이다.

이런 인상을 주는 정치인을 ‘용’이라 부르는 것은 너무나 과분하지 않은가? ‘주역’을 읽은 적이 없는 나의 아내는 라디오에서 ‘잠룡’이라는 말을 들으면 ‘잡룡’(雜龍)이 먼저 떠오른다고 했는데, 두 낱말의 발음이 비슷한 데에서 나온 것이지만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표출된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아무나 용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가운데 이른바 ‘잠룡’ 중의 하나인 박원순 서울시장의 발언이 눈에 띈다. 그는 지난 9월 6일 북미 3개 도시 순방 중 뉴욕 현지 교민들과의 간담회에서 대선 출마 여부를 묻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자신은 “천하의 걱정을 먼저하고 천하의 기쁨을 나중에 한다”는 말을 좋아한다고 했다. 북송의 명재상 범중엄(范仲淹)이 한 이 말은 유명한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나오는 구절이다. 관련된 부분만 인용해 본다.

(옛 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살펴보니) 조정의 높은 곳에 있을 때는 백성을 걱정하고 먼 시골에 있을 때는 임금을 걱정하니 나아가도 걱정하고 물러나도 걱정한다. 그러니 어느 때에 즐겁겠는가? 그들은 반드시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한 후에 즐거워한다”고 말할 것이다.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한 후에 즐거워한다”는 말은 위정자가 지녀야 할 가장 근본적인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진정 이런 자세로 정치를 한다면 국민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것이다. 박원순 시장은 지난 7월 5일 민선 6기 2주년 기자회견 때에도 이 구절을 인용했다. 비록 범중엄을 청나라 사람이라 했다가 북송 시대의 사람이라 하는가 하면 원문의 해석도 들쭉날쭉하지만 ‘용’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적어도 이런 자세를 갖는다는 것 자체는 바람직한 일이다. 박 시장이 실제로 이런 정신을 시정에 구현했는가의 여부는 별도의 검증이 필요한 일이지만.

박근혜 대통령도 지난 9월 5일 G20 정상회의에서 중국의 시진핑 주석에게 사드 배치의 불가피성을 설득하는 자리에서 “넓지 않은 나의 어깨에 5천만 국민의 생명과 안위가 달려 있어 밤잠을 못 잔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또한 말만으로는 범중엄의 정신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진정성과 실행이다. 진정으로 5천만 국민이 근심하기에 앞서 걱정하고 5천만 국민이 즐거워한 후에 즐거워하는 자세로 국정을 펼쳐 왔는지 냉철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자세로 국정을 펼칠 것인지 5천만 국민은 지켜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