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이여, 불이 작다고 하여 깔보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되나니, 그것이 만약 태울 것을 만나면 크나큰 불무더기가 되어 남자건 여자건 어리석은 이를 공격하여 순식간에 태워버립니다.”

2600여 년 전 부처님과 고대 인도 꼬살라국의 빠세나디 왕이 나눈 대화 가운데 한 구절이다. 과연 그 말씀처럼 작은 촛불은 모이고 모여 강을 이루고,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거대한 횃불이 되어 민심을 거스르고 권력을 사유화한 어리석은 이들을 태워버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쁜 것을 태워 없애는 것은 어려운 중에도 그나마 쉬운 편이다. 태워버린 자리에 무엇을 어떻게 다시 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가 훨씬 어렵다. 그리고 정유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무등산 위로 해가 떠오른다. 광주시민이 가장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무등산은 그 이름이 너무나 훌륭하다. 어떤 이들은 무등(無等)을 등급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 평등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무등은 불교에서 아주 중요하게 쓰이는 말로 같은 것, 비슷한 것이 없다는 뜻이다. 불교인이라면 늘 입에 달고 다니는 경전인 반야심경에는 무등등주(無等等呪)라는 구절이 있는데, 같은 것이 없는, 비교할만한 것이 없는 ‘다라니’라는 말이다. 비교할만한 것이 없으니 가장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같은 뜻으로 나오는 말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다.

산세의 강건함으로 보자면 설악이 있고, 크고 웅장하기로는 남악(지리산)이 있지만, 그들이 뭐라 하든지 ‘나는 비교불가’라고 외치는 것이 ‘무등’이라는 이름의 산이다. 가장 높지도, 가장 크지도, 가장 험준하지도 않은데 무등이라니, 지나친 과장이요 실상은 거짓에 불과한 것일까. 또 우리의 상식으로 최고라면 1등인데, 무등도 최고라 하니 이것은 어떻게 다르단 말인가.

누군가 당신에게 ‘가족 중에서 누가 제일 귀한가’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똑같이 귀하다고 하는 말은 정직하지 않다. 아이에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물을 때 아이가 고민에 빠지는 것은 엄마와 아빠가 똑같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엄마는 엄마대로 좋고, 아빠는 아빠대로 좋다. 나이 드신 아버지, 어머니나 말썽꾸러기 아이들도 제각각 다 귀하다. 똑같이 귀한 것이 아니라 제각각 다 귀하다. 비교해서 누가 더 귀한 것이 아니라 제각각 절대적으로 귀하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 생신에는 늙은 어머니가 제일 귀했는데, 중학생 아들이 음식을 먹다가 체하니 생일상 받은 어머니를 제치고 중학생 아들이 제일 귀한 존재가 된다. 당장 우선적으로 보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제각각 다 존귀하면서도 상황에 따라 우선할 사람이 달라진다. 이것이 무등이다.

모두가 제각각 고유의 가치로 비교할 수 없이 존귀하다는 무등의 관점은 획일적 가치를 배격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실질적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권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가 강화되며, 사회적 약자를 우선적으로 보호하는 공동체적 정의로 연결된다. 서울대 입학, 대기업 취직이라는 문 앞에 줄 세워진 획일적 학교 교육은 설 자리를 잃고, 아이들의 적성과 발달에 따라 행복한 삶을 가꿀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교육으로 전환하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잘 살아보자고, 일등하자고, 부자 되자고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일등이 되어 성공하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승자독식 시스템은 결국 양극화 등 ‘헬조선’으로 불리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낳았고, 대통령의 국정 농단도 같은 질병에서 생겨난 것이다. 일등주의가 아닌 무등주의, 넘버원이 아닌 온리원(only one)으로 가치를 전환하는 것이 ‘헬조선’ 문제를 근원적으로 치유하는 길이 될 것이다.

1월 5일, 음력 12월 8일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이룬 날이다. 석가모니가 깨달은 연기의 진리를 표현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무등이다. 어리석음의 어둠을 깨뜨린 깨달음의 빛, 그래서 무등산에 깃들어 있는 빛고을이라는 이름은 예사롭지 않다. 정유년 벽두에 광주의 가치, 무등의 가치로 거듭나는 화엄세상 대한민국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