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남지 제3부] (4)호남평야를 지켜온 김제 벽골제
2017년 04월 11일(화) 00:00 가가
백성 먹여 살린 남녘 ‘볏골’의 젖줄 … 농경문화 자산
벽골제의 상징인 쌍룡 모형. 지난 2007년 대나무 수만 개를 엮어 만든 쌍룡은 각각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면서 마주 보는 형상을 하고 있다. 벽골제에는 제방을 허무는 용에게 목숨을 받쳐 이를 지켜냈다는 ‘단야낭자 설화’가 전해지며 매년 지평선 축제 때에는 이 설화가 놀이로 재연된다. 〈필자 제공〉
벼의 고을 ‘볏골’에서 유래
광주·전남·전북을 포함한 호남은 흔히 호수(湖)의 남쪽이란 뜻으로 금강 이남을 가리킨다. 금강의 옛 이름이 호강(湖江)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제 벽골제를 호수로 보고 그 이남을 말하기도 한다. 삼국시대 ‘호수’로 불렸던 3대 저수지로는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 제천 의림지를 들지만, 단연 으뜸은 김제 벽골제였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흘해이사금 21년에 “처음 벽골제를 열었는데, 그 둘레가 1800보(步)이다”라고 하여, AD 330년 신라에서 만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4세기 무렵 김제가 백제의 영역이었음을 고려하면, 신라가 아닌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으로 보아야 옳다. 백제 구수왕 9년(222) 2월조에 “유사에게 명하여 제방을 쌓게 했다”라는 기사로 미루어, 백제 지역에서는 이미 이른 시기부터 제방이 널리 축조되고 있었음도 그 증거다.
‘푸른 뼈의 제방’이라는 한자 이름을 지닌 ‘벽골제’의 이름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백제가 이 지역을 통합하기 전 김제는 마한 54개 소국 가운데 가장 넓은 벽비리국이었고, 마한이 백제에 병합된 뒤로는 벽골군(碧骨郡)이 된다. 이때의 지명 ‘벽골’을 저수지 이름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다른 재미난 유래도 있다. 김제는 벼가 많이 생산되는 고을이라고 해서 ‘벼의 고을’ 즉 ‘볏골’이라 불렸는데, 한자로 옮겨지면서 ‘벽골’이 되었다고 한다. ‘벼 고을의 둑’인 셈이다.
그런데 벽골제 이름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전설도 전한다. 벽골제를 쌓을 때 매번 조수가 밀려와 그동안 쌓은 제방을 망쳐놓곤 했다. 어느 날 공사 감독의 꿈에 신령님이 나타나 벽골, 즉 푸른 뼈를 흙과 함께 섞어 제방을 쌓으면 공사가 무난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암시를 줬다. 그래서 뼈가 푸르다는 말뼈를 갈아 흙과 함께 섞어 쌓아 공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실제로 말뼈에는 인 성분이 많아 푸른색을 띠며 아교와 같이 물질을 응축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한다.
호남평야를 적시다
벽골제는 최초 뿐 아닌 규모면에서도 감탄을 금치 못한다. 삼국사기에는 둑의 길이가 ‘1800보’라 하고 있고, 태종실록에는 ‘7196척’, 동국여지승람에는 ‘6만843척’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수치들을 오늘날의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삼국사기는 약 3245m, 태종실록은 3362m다. 1975년 유적 발굴 당시 실측 결과 제방 길이는 3300여m였다.
제방 길이만 3000m가 넘고 저수지 둘레는 40㎞에 이른다고 하니, 정말 엄청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그럼, 벽골제에 가득 담긴 물이 적셔준 호남평야는 어디까지였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벽골제 중수비에는 “다섯 개의 도랑을 파서 논에 물을 대는데, 논은 무릇 9840결(結) 95복(卜)이다. 물을 대는 도랑은 5개가 있다.
그 첫째 도랑을 수여거(水餘渠)라고 하는데, 한 줄기 물이 만경현의 남쪽에 이른다. 둘째 도랑을 장생거(長生渠)라고 하는데, 두 줄기 물이 만경현의 서쪽에 이른다. 셋째 도랑을 중심거(中心渠)라고 하는데, 한 줄기의 물이 고부의 북쪽 부령의 동쪽에 이른다. 넷째 도랑을 경장거(經藏渠)라 하고, 다섯째 도랑을 유통거(流通渠)라고 하는데, 둘 다 한 줄기 물이 인의현의 서쪽으로 흘러 들어간다.”
중수비의 다섯 수로가 미치는 방향과 범위를 통해 유추된 벽골제의 혜택을 받는 지역은 제방 서쪽의 김제, 만경 남서부, 부안 동부, 고부 그리고 태인 서부 일대로 추정된다. 이는 오늘날 호남평야의 대부분을 포함한다. 너무 규모가 커 문제였을까? 한 때 학계에서는 저수지인지, 방조제인지를 놓고 열띤 논쟁이 일기도 했다.
벽골제 축조 이후 몇 번에 거쳐 중축이 이루어진다. 통일신라 원성왕 6년(790), 고려 현종, 고려 인종 21년(1143) 때에 고쳐 쌓았고, 조선 태종 15년(1415)에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다. 태종대의 벽골제 중수는 중수비에 의하면 옥구진 병마사 김훈과 경양방죽을 축조한 것으로 알려진 김제군수 김방의 감독하에 군 장정 1만 명과 전문가 100명이 동원되어 한 달 만에 완료했다고 한다.
그러나 벽골제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중수한 지 불과 5년 만인 세종 2년(1420)에 대풍우를 만나 무너졌고, 제방 아래의 수전 2000여 결이 유실되는 대 손실을 입기에 이른다. 이후 벽골제의 복구 여부를 둘러싸고 뜨거운 찬반양론이 제기되었지만, 세종 10년(1428)에 벽골제 폐지를 공식 선언한다. 벽골제의 존폐를 둘러싼 이러한 논란은 국가적 차원에서조차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규모가 지나치게 방대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규모의 벽골제가 4세기경에 만들어졌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제 강점기인 1925년 동진토지개량조합에 의해 농업용 간선수로로 개조되면서, 오늘 벽골제는 그 원형마저 잃어버렸다.
호남인 농경 DNA 일깨워
세월은, 인간은 무서운 파괴자였지만 모든 흔적을 다 지울 수는 없다. 2.5㎞가 넘는 제방, 다섯 수로 중 하나였던 장생거와 경장거, 그리고 1415년의 중수를 기록한 중수비가 남아 있다. 1800년을 버티고 견뎌낸 벽골제의 문화원형이다. 그 문화원형에는 청해진 혁파 이후 강제로 끌려간 장보고 관련 인물들의 한도 포함되어 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친구 현덕승에게 “호남은 국가의 보장이니,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가 없을 것이다.”라는 편지를 쓴다. “호남은 국가의 물적 기반이니 반드시 지켜내야만 한다”는 뜻으로 요약된다. 둑 위에 올라 바라다 본 지평선과 지평선이 만나는, 끝없이 펼쳐진 호남평야의 위용은 정말 대단했다. 그것은 국가의 물적 기반이 되었고, 호남의 존재 이유이기도 했다.
벽골제가 품었던 호남평야의 지평선과 장생거 등의 문화 원형은 벽골제 축조시에 만들어진 단야 낭자의 설화가 전승된 쌍룡놀이 등과 함께 지평선 축제로 거듭났다. 지평선 축제는 대한민국 최대 농경 축제로 엄청난 호응을 받고 있다.
호남인들의 몸속에 꿈틀대는 농경 DNA와 국가의 물적 기반이 된 김제 벽골제가 갖는 문화원형은 호남의 큰 자산이 아닐 수 없다.
*노성태 광주시 전남도교육연수원 강사
-빛고을역사교사모임 회장
-교육과정 심의회 역사분과 위원
-광주 국제고등학교 수석교사
광주·전남·전북을 포함한 호남은 흔히 호수(湖)의 남쪽이란 뜻으로 금강 이남을 가리킨다. 금강의 옛 이름이 호강(湖江)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제 벽골제를 호수로 보고 그 이남을 말하기도 한다. 삼국시대 ‘호수’로 불렸던 3대 저수지로는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 제천 의림지를 들지만, 단연 으뜸은 김제 벽골제였다.
‘푸른 뼈의 제방’이라는 한자 이름을 지닌 ‘벽골제’의 이름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백제가 이 지역을 통합하기 전 김제는 마한 54개 소국 가운데 가장 넓은 벽비리국이었고, 마한이 백제에 병합된 뒤로는 벽골군(碧骨郡)이 된다. 이때의 지명 ‘벽골’을 저수지 이름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벽골제 이름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전설도 전한다. 벽골제를 쌓을 때 매번 조수가 밀려와 그동안 쌓은 제방을 망쳐놓곤 했다. 어느 날 공사 감독의 꿈에 신령님이 나타나 벽골, 즉 푸른 뼈를 흙과 함께 섞어 제방을 쌓으면 공사가 무난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암시를 줬다. 그래서 뼈가 푸르다는 말뼈를 갈아 흙과 함께 섞어 쌓아 공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실제로 말뼈에는 인 성분이 많아 푸른색을 띠며 아교와 같이 물질을 응축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한다.
호남평야를 적시다
벽골제는 최초 뿐 아닌 규모면에서도 감탄을 금치 못한다. 삼국사기에는 둑의 길이가 ‘1800보’라 하고 있고, 태종실록에는 ‘7196척’, 동국여지승람에는 ‘6만843척’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수치들을 오늘날의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삼국사기는 약 3245m, 태종실록은 3362m다. 1975년 유적 발굴 당시 실측 결과 제방 길이는 3300여m였다.
제방 길이만 3000m가 넘고 저수지 둘레는 40㎞에 이른다고 하니, 정말 엄청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그럼, 벽골제에 가득 담긴 물이 적셔준 호남평야는 어디까지였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벽골제 중수비에는 “다섯 개의 도랑을 파서 논에 물을 대는데, 논은 무릇 9840결(結) 95복(卜)이다. 물을 대는 도랑은 5개가 있다.
그 첫째 도랑을 수여거(水餘渠)라고 하는데, 한 줄기 물이 만경현의 남쪽에 이른다. 둘째 도랑을 장생거(長生渠)라고 하는데, 두 줄기 물이 만경현의 서쪽에 이른다. 셋째 도랑을 중심거(中心渠)라고 하는데, 한 줄기의 물이 고부의 북쪽 부령의 동쪽에 이른다. 넷째 도랑을 경장거(經藏渠)라 하고, 다섯째 도랑을 유통거(流通渠)라고 하는데, 둘 다 한 줄기 물이 인의현의 서쪽으로 흘러 들어간다.”
중수비의 다섯 수로가 미치는 방향과 범위를 통해 유추된 벽골제의 혜택을 받는 지역은 제방 서쪽의 김제, 만경 남서부, 부안 동부, 고부 그리고 태인 서부 일대로 추정된다. 이는 오늘날 호남평야의 대부분을 포함한다. 너무 규모가 커 문제였을까? 한 때 학계에서는 저수지인지, 방조제인지를 놓고 열띤 논쟁이 일기도 했다.
벽골제 축조 이후 몇 번에 거쳐 중축이 이루어진다. 통일신라 원성왕 6년(790), 고려 현종, 고려 인종 21년(1143) 때에 고쳐 쌓았고, 조선 태종 15년(1415)에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다. 태종대의 벽골제 중수는 중수비에 의하면 옥구진 병마사 김훈과 경양방죽을 축조한 것으로 알려진 김제군수 김방의 감독하에 군 장정 1만 명과 전문가 100명이 동원되어 한 달 만에 완료했다고 한다.
그러나 벽골제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중수한 지 불과 5년 만인 세종 2년(1420)에 대풍우를 만나 무너졌고, 제방 아래의 수전 2000여 결이 유실되는 대 손실을 입기에 이른다. 이후 벽골제의 복구 여부를 둘러싸고 뜨거운 찬반양론이 제기되었지만, 세종 10년(1428)에 벽골제 폐지를 공식 선언한다. 벽골제의 존폐를 둘러싼 이러한 논란은 국가적 차원에서조차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규모가 지나치게 방대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규모의 벽골제가 4세기경에 만들어졌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제 강점기인 1925년 동진토지개량조합에 의해 농업용 간선수로로 개조되면서, 오늘 벽골제는 그 원형마저 잃어버렸다.
호남인 농경 DNA 일깨워
세월은, 인간은 무서운 파괴자였지만 모든 흔적을 다 지울 수는 없다. 2.5㎞가 넘는 제방, 다섯 수로 중 하나였던 장생거와 경장거, 그리고 1415년의 중수를 기록한 중수비가 남아 있다. 1800년을 버티고 견뎌낸 벽골제의 문화원형이다. 그 문화원형에는 청해진 혁파 이후 강제로 끌려간 장보고 관련 인물들의 한도 포함되어 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친구 현덕승에게 “호남은 국가의 보장이니,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가 없을 것이다.”라는 편지를 쓴다. “호남은 국가의 물적 기반이니 반드시 지켜내야만 한다”는 뜻으로 요약된다. 둑 위에 올라 바라다 본 지평선과 지평선이 만나는, 끝없이 펼쳐진 호남평야의 위용은 정말 대단했다. 그것은 국가의 물적 기반이 되었고, 호남의 존재 이유이기도 했다.
벽골제가 품었던 호남평야의 지평선과 장생거 등의 문화 원형은 벽골제 축조시에 만들어진 단야 낭자의 설화가 전승된 쌍룡놀이 등과 함께 지평선 축제로 거듭났다. 지평선 축제는 대한민국 최대 농경 축제로 엄청난 호응을 받고 있다.
호남인들의 몸속에 꿈틀대는 농경 DNA와 국가의 물적 기반이 된 김제 벽골제가 갖는 문화원형은 호남의 큰 자산이 아닐 수 없다.
*노성태 광주시 전남도교육연수원 강사
-빛고을역사교사모임 회장
-교육과정 심의회 역사분과 위원
-광주 국제고등학교 수석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