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국 궁예의 수군 장군이던 왕건(877∼943)은 903년부터 918년 고려 개국까지 많은 시간을 나주(금성)에서 보냈다. 어느 날, 왕건은 냇물 상류에 떠있는 상스러운 오색 구름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물길을 따라 올라갔다. 우물에서 한 낭자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왕건이 물 한 그릇을 청하자 낭자는 버들잎을 물바가지에 띄워 건넸다. 물을 급히 마시면 체할까봐 천천히 마시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낭자는 나주 목포(현 영강동·송월동 일대)에 살던 오다련군의 딸이었다. 왕건과 오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왕무, 후일의 혜종(912∼945)이다. 오씨는 신혜왕후 류씨가 세상을 떠난 후 뒤를 이어 왕후가 됐다. 타계 후 시호를 장화왕후(莊和王后)라 했다.

◇나주, 후삼국 통일 결정적 역할=고려시대에 나주는 ‘어향’(御鄕)으로 불렸다. 나주가 왕건의 맏아들이자 2대 왕에 오른 혜종의 외가였기 때문이다. 또한 나주는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개국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나주를 중심으로 한 해상세력은 후백제 견훤 대신 개경(송도) 해상세력에 기반을 둔 왕건과 연대하고 지지한 것이다.

고려를 개국한 태조 왕건은 나주를 특별하게 여겼다. 개경 중앙정부와 별도 기구인 ‘나주도대행대’(羅州道大行臺)를 설치하고 요즘의 총리 격인 시중을 파견할 정도였다.

혜종이 태어난 해는 912년. 6년후인 918년에 태조 왕건은 고려를 개국하고 즉위하자 아들 무를 정윤(正胤=태자)으로 책봉하려 했으나 패서(浿西=예성강 서쪽 황해도) 세력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무는 즉위 4년째인 921년에 영암 출신 최지몽과 충남 당진 출신 박술희, 복지겸 등 서남해안 지역 해상세력의 후원 속에 태자로 책봉될 수 있었다. 무는 태조가 943년 세상을 떠나자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단명해 재위기간은 2년여에 그쳤다.

혜종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고려말에 나주 소재동으로 유배를 온 삼봉 정도전이 나주 동루에 오른 후 쓴 글에서 짐작할 수 있다.

“태조가 백제를 취하는 데는 나주 사람들의 힘이 컸으므로 태조는 친히 이 고을에 납시어 목(牧)으로 승격시키고 남쪽 여러 고을을 통솔하게 하였는데, 이는 대개 포양(褒揚=칭찬하여 장려함)하는 뜻에서였다. 그때 혜종은 몸소 갑주를 입고 태조를 전후좌우에서 도왔다. 그래서 공로가 여러 아들 가운데서 가장 많았다….”

조선초 문종때 편찬한 ‘고려사절요’는 혜종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장성하자 기상과 도량이 넓고 크고, 지혜와 용맹함이 뛰어났으며, 태조를 따라 백제를 정벌하여 공을 세웠다.”

또한 ‘나주시지’(誌)는 혜종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왕위에 있었던 기간이 2년4개월로 지극히 짧아 뚜렷한 치적은 없다. 대내적으로는 군웅이 할거하는 풍조가 많았던 모든 세력들을 없애고 건국 초기의 흐트러진 사회질서를 바로잡아 오백년 고려왕조의 터전을 굳히었고, 대외적으로는 주변 국가들과 선린정책을 펴서 큰 전란이 없었다.”

나주시 김종순 역사도시사업단 문화재관리팀장은 “한 나라의 왕이 이 동네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그 왕이 태어난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전라도 사람들의 힘이란 게 그 당시 있었기 때문에 태어난 것이지 어느 날 하루 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면서 “혜종은 고려를 개국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역사 흐름의 큰 역할을 하신 분으로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왕건 슬하의 아들은 모두 25명. 왕건이 여러 지역의 호족을 자기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유력 호족들 딸들과 정략적인 혼인을 했기 때문이었다. 자연히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혜종은 배다른 형제인 왕요, 왕소 등으로부터 암살 위협을 받았다.

혜종은 영암 출신 ‘브레인’인 책사 최지몽의 선경지명으로 위기를 여러 차례 모면했다. 한번은 자객이 왕 침소에 잠입했으나 혜종의 주먹질에 되려 죽기도 했다. 왕위를 노리는 왕요, 왕소의 의도를 알아채고도 이들을 벌하지 않았다. 왕위에 오를만한 정적들을 모두 제거해버린 후대 왕들과 대조를 이룬다. 관용을 베푼 이런 통치 지도력은 한편으로 ‘나약하다’는 후대의 평가를 받기도 한다. 결국 만 33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혜종의 죽음에 대해 독살설이 떠도는 까닭이다.

◇나주민들, 사당 세워 혜종 기려=나주는 개국뿐만 아니라 거란족의 2차 침입 때 8대 왕인 현종이 몽진을 올 정도로 고려왕실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堡壘) 역할을 했다. 개경을 떠난 현종의 피난길은 험난했다. 신하들이 왕 곁을 떠나 버렸다. 후백제 수도였던 전주에 도착했을 때는 위협을 받기도 했다.

현종은 1011년 정월 13일 나주에 도착해 21일 떠날 때까지 열흘 가까이 나주에 머물렀다. 고려왕실에서 가장 믿을만한 지역은 나주였다. 지금도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지나갔다는 내용을 기록한 ‘사마교비’(駟馬橋碑)가 금성관 경내에 세워져 있다.

현종 역시 반갑게 맞아준 나주를 잊지 않았다. 국가적인 중요행사로 개경과 서경(평양)에서만 열던 팔관례(八關禮=토속신에게 제사 지내던 의식)를 개최하도록 하도록 한 것이다. 또한 1018년에 대대적으로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나주에 목사주(牧使州)를 설치했다. 그래서 나주는 지금도 ‘천년 목사고을’이라고 불린다.

혜종은 전라도와 나주 천년 역사를 읽는 주요 키워드다. 나주시청 인근 국도 13호선 도로변에 자리한 완사천을 비롯해 나주 서문안 석등(보물 364호)에서 혜종의 흔적을 일부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지금은 없어졌지만 흥룡사(興龍寺)와 혜종사(惠宗祠) 이름에도 남아있다. 혜종이 태어난 마을을 흥룡동이라 했는데 왕실 원찰로 흥룡사가 세워졌다. 그리고 절 안에 혜종의 소상(흙으로 빚은 상)과 어진(초상화)을 모시는 사당(혜종사)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 세종 때인 1429년 1월에 운관사 장득수와 군인 80명이 내려와 혜종의 소상과 영정을 덮개 있는 교자(較子)에 모시고 갔다고 전한다. 지역 향토사 연구자들은 혜종사가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바뀌었다가 임진왜란을 전후해 흥룡사와 함께 폐지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연꽃무늬가 새겨진 나주향교 대성전 주춧돌을 흥룡사 부재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

또한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일본인에 의해 서울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지난해 88년 만에 고향 나주로 돌아온 ‘나주 서성문안 석등’ 역시 원래 흥룡사 경내에 있었던 유물이다. 나주읍성의 안정과 부귀를 얻고자 석등을 1093년(고려 선종 10년)에 조성한다는 명문이 석등 팔각기둥에 새겨져 있다.

‘전라도 천년’을 맞아 천년 목사고을 나주의 위상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나주시는 새해에 나주와 전라도가 천년의 역사 동안 어떠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구체적인 사건과 역사 중심으로 기술하는 ‘나주 천년사’를 펴낼 계획이다.

김종순 문화재관리팀장은 천년 나주의 특성에 대해 “나주는 주저주저하지 않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였다. 나주 불회사로 불교가 유입됐고, 복암리에서 중국 신(新)나라 화폐인 ‘화천’이 나왔다. 영산강을 ‘영산내해’ 바다개념으로 봤다. 나주는 서남해안 문물 루트의 종점이면서 시점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나주 혁신도시는 미래 전라도 성장동력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전라도 천년’을 맞아서 미래 천년을 얘기할 때 광주·전남 혁신도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나름대로 나주나 전라도 역사 발전에 있어서 새로운 길들을 열어나가는 축(軸)과 맞아떨어지지 않나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글·사진=송기동기자 song@

/나주=서충열기자 scy@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