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이 있다. 보통명사화 되다시피 한 이 말은 명예만큼 의무를 다한다는 뜻이다. 원래 노블리스라는 말은 ‘닭’을, 오블리제는 달걀의 ‘노른자’를 의미한다. 닭의 존재 이유는 벼슬을 내세우는 데 있지 않고 알을 낳는 데 있다는 것이다. 고전적 의미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사회 지도층의 희생과 봉사 정신을 뜻한다. 권리와 명예만을 누리지 않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한다는 의미다.

시대를 초월해 이를 실천한 이들은 대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희생정신은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처해 있을 때 빛을 발한다. 국난이라는 위기의 상황은 지도층들에게 필연적으로 선택을 요구한다.

여기 한 젊은이가 있다. 그는 오늘날로 치면 ‘금수저’ 출신이다. 집안이면 집안, 학벌이면 학벌, 재력이면 재력을 다 갖춘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일강(一江) 김철(金澈) 선생(1886∼1934).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그였지만 가슴에는 늘 허허로움과 중압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세상에서 말하는 좋은 가문 출신이지만 식민지 조국의 현실은 그에게 평안을 주지 않았다.

김철 선생은 1886년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구봉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 김동진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서 4남1녀 중 3남으로 태어난 그는 일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그의 삶은 한 편의 장대한 드라마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역동적이었고 극적이었다.

잠시 그의 생애를 간략하게나마 들여다보자.

일강 김철 선생은 어린 시절을 영광군 묘량면 외가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이후 영광 광흥학교에서 중학과정을 이수한다. 당시 광흥학교는 지역 유지들이 세운 사학으로 경술국치 이후 시위를 전개하다 강제로 폐교 조치됐다. 청소년기의 김철이 자주독립에 대한 원대한 꿈을 품게 된 것은 그러한 연유와 무관치 않다.

일강은 이후 서울 경성법률전수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법학부에서 공부했다. 졸업을 하고 귀국한 뒤로는 가슴에 품은 이상을 하나씩 실천하기에 이른다. 집안의 머슴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모두 밖에 나가 살도록 허락했다.

강직하면서도 우국충정이 가득한 그를 일제는 불온한 눈으로 주시했다. 회유가 시작된 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중국으로 떠나기 전, 일강 선생은 김씨라는 여인과 혼인을 맺는다. 달콤한 신혼생활도 잠시, 일강은 상해로 망명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독립운동에 평생을 헌신하겠노라고 작정하자 현실의 부귀와 영화는 한낱 꿈처럼 생각되었다.

선생은 1917년 몰래 국내로 잠입해 3·1운동 거사를 준비했다. 또한 재산은 의미 있는 일에 쓸 때 가치가 있다는 생각으로 천석꾼 재산을 정리한다. 상해로 다시 건너간 선생은 준비해 간 재산을 상해임정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는다. 당시 선생은 국무위원 전라도 대표와 교통부총장대리 요직을 맡아 조국의 광명을 위해 헌신한다.

1932년 선생이 상해임정의 군무장(지금의 국방부장관)이었을 때다. 선생은 일생일대의 중요한 순간에 직면한다. 바로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폭탄 투척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윤봉길의 의거는 일본 열도는 물론 중국과 세계를 놀라게 한 의열투쟁이었다. 곧바로 일제의 임정 요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됐고 임정 수반들은 항저우로 임시정부를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항저우로 임시정부를 이전한 뒤의 상황은 더 악화됐다. 일강이 고향의 전답을 팔아 마련한 자금은 거의 바닥이 드러났다. 물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친 물질이 영광스럽게 쓰인 것에 대해 추호의 후회도 없었다. 그 즈음 일강의 몸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과로로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에서 급성폐렴에 걸린 것이다.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영양실조와 누적된 피로는 그의 몸이 버텨내기에는 한계에 다다랐다.

한 번 쓰러지고 난 뒤 그는 영영 눈을 뜨지 못했다. 조국 광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의로운 사내는 독립을 보지 못하고 이역만리 타국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48세(1934년 6월 29일)였다. 일강 선생의 장례는 임시정부장으로 이시영, 좌완구 등 요인들의 애도 속에 저장성 후산탕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 광복은 선생이 숨진 지 11년 뒤에 이뤄졌다.

애통한 것은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묘소는 잊혀지고 말았다는 점이다. 개발붐이 일어 공동묘지 일대가 아파트단지로 변해 묘소 위치조차 파악할 수 없게 됐다. 1962년 3·1절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고 유해봉안운동이 추진됐지만, 유해를 찾을 길이 없었다. 1993년 일강 선생의 유지를 받드는 향토사학자가 저장성을 방문해 공동묘지 인근의 흙을 가져왔다. 후손들은 이 흙을 토대로 함평 구봉산 기슭에 묘소를 마련했다.

함평 신광면 구봉(九峰) 마을, 아홉 개의 봉우리는 아늑하게 마을을 감싸 안아 안온하고 평화롭다. 현재 일강의 생가 인근에는 상해임시정부청사가 재현돼 있다. 모든 재산을 처분해 독립운동에 기여했던 선생의 뜻을 기리자는 의미가 이곳 건물에 투영돼 있는 것이다.

“선생은 천석꾼의 재산을 처분해 ‘상해임시정부청사’(독립운동역사관)를 마련하는데 기여했고 나머지는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면서 상해 임시정부의 교통차장, 국무원 회계검사원장, 군무장, 재무장 등을 역임했으며 임시정부 수립과 운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함평에 왜 상해임시정부청사가 들어서게 됐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곳 청사는 지난 2009년 6월에 완공됐으며 이보다 앞서 청사 옆의 김철 기념관은 2003년에 완료됐다.

청사에 들어가기 전 왼편 언덕 너머로 소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기품있어 보이는 소나무는 겨울 볕을 받아 처연하다. 단심송(丹心松)이라 불리는 소나무는 일강의 부인 김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데서 붙여졌다. 어떤 이들은 ‘순절 소나무’라고도 한다. 당시 일제 헌병들은 김철 선생을 감시한다는 명분 하에 여사를 찾아와 귀찮게 굴었다.

여사는 혹여 자신이 욕을 당하면 남편과 나라에 누가 된다는 생각에 스스로 소나무에 목을 맸다. 죽음으로 정절을 지킨 여사의 정신은 푸른 소나무처럼 여전히 푸른빛으로 구봉 마을을 지키고 있다.

/박성천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