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의 마술사’ 임직순을 아시나요
2021년 04월 29일(목) 05:00
나이를 꽤 먹은 나도 그를 자세히 모르는데 요즘 젊은이들이 그를 알 리 없다. 미술에 문외한인 내가 그를 잘 알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그림을 전공하는 미술학도들이라면 아무리 젊다 해도 그를 모를 리 없다. 그만큼 그는 이 지역 화단의 거장(巨匠)이니까.

흔히 호남 서양화단의 선구자를 말할 때 추상 계열의 김환기·강용운·양수아와 함께 구상 계열에선 오지호(1905∼1982)와 임직순(1921∼1996) 두 사람을 꼽는다. 그중 오늘 이야기하려는 주인공은 임직순이다. 그는 1961년 오지호 후임으로 조선대 미술과 교수를 맡으면서 광주와 인연을 맺게 된다. 따라서 임직순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오지호에 대해 언급할 필요를 느낀다.

황해도 개성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오지호가 1948년 광주로 내려와 정착한 이후 호남 서양화단은 개화(開花)를 꿈꾼다. 밝고 맑은 한국적인 색을 기본으로 작가의 개성이 담긴 독특한 화풍이 등장하는 이 시기 작가들은 풍부한 빛에 감성을 담아 자연에서 느끼는 생명감을 표현했다. 이러한 작품 양식은 이 지역 서양화단의 큰 맥이 되어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다.

오지호는 휘문고보 재학 시절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에게 그림을 배운 뒤 일본 동경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일본인으로부터 받은 일본적 암흑의 색채를 버려야 한다는 민족주의 예술 관점을 제시했다. 오색 찬연한 조선의 색채를 회화의 기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 우리 민족의 따스한 감성을 표현한 예술가’라는 평을 듣는 것은 그 때문이다.



호남 서양화단에 씨 뿌린 거장



1942년 전쟁기록화를 그리라는 총독부의 명령을 오지호가 거부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사상이 의심스러운 인물로 분류돼 감시를 받으며 피신 생활을 하다 해방 바로 전 화순 동복 집으로 돌아온다. 고향에서 해방을 맞은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조선미술건설본부 임원 등을 지냈으며 1948년 광주에 완전히 정착한다. 1949년 조선대 미술학과 교수로 부임한 이후 1960년대 초까지 조선대와 조대부고에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 냈다. 아들인 오승우와 오승윤을 비롯해서 조규일·강연균·임병규·송용·최쌍중·박동인·배동환 등등.

오지호는 ‘지조 있는 예술가’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다음날인 5월 17일엔 4·19혁명 관련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혁명재판에 회부된 오지호는 1년 가까이 옥고를 치러야 했다. 임직순이 낯선 땅인 광주에 내려온 것은 이 무렵이다. 당시 오지호는 여러 가지 정치적인 상황에 떠밀려 후임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강사로 재직 중이던 자신의 제자 진양욱을 임직순이 머물던 서울로 급파한다. 1960년이었다.

그때 임직순은 몹시 가난해서 6만 원의 빚을 갚아야 조선대로 부임할 수 있다고 했다. 조선대 측은 이 빚을 갚아 주는 대신 향후 받게 될 월급에서 매달 공제하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소매치기가 많던 시절이라 현금을 직접 전달하는 데에는 위험이 따랐다. 진양욱은 전대(纏帶: 돈이나 물건을 넣는 자루)를 만들어 허리춤에 찬 후 밤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다. 이때 오지호가 임직순을 자신의 후임으로 정한 것은 이미 임직순의 명성을 들어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숙명여고 교사로 재직 중이던 임직순은 최고의 인기 화가이기도 했다.



자상한 성품 많은 제자 길러 내



임직순은 충청북도 괴산군 수안보(지금은 충주시로 편입됐음)에서 태어났다. 1936년 일본에 건너가 1942년 동경 일본미술학교 유화과를 졸업했다. 한데 그가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흥미롭다. 학창 시절 친구의 여동생인 한 여학생을 짝사랑했는데, 그 소녀에게 뭔가 보여 주고 싶어 일본행을 택했다는 것이다. 임직순의 그림에 숱하게 많은 소녀(여인)가 등장하는 것은 아마도 이때의 첫사랑이 자연스럽게 작품의 주제로 발전한 것일 터이다.

그는 미술학도 시절인 1940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정물’이 입선되었고 광복 후 1949년 제1회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는 ‘가을 풍경’과 ‘만추’(晩秋)가 입선됐다. 이어 6·25 전쟁으로 중단됐던 국전이 1953년 재개된 이후 해마다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였는데, 특히 1957년 제6회 국전에서는 ‘좌상’(坐像)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크게 각광을 받았다. 1959년에는 추천작가가 되었고 1963년부터는 초대작가로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그리고 조선대 교수로 1974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14년간 광주에 거주하며 서정적 색채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임직순은 인상주의적인 화풍의 밝고 정감 있는 색채를 구사했으며 그래서 ‘특출한 색채적 표현주의 화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조선대에서는 오지호와 마찬가지로 색채 존중 기법을 지도하여 자연주의 성향의 호남 서양화풍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임직순에게 배운 제자들로는 김재형·황영성·이태길·송용·최영훈·문옥자·국중효·정송규 등이 있다. 그리고 이들 예술가들에 의해 구상 계열 남도 서양화단의 화려한 꽃이 비로소 피어났다.

임직순은 작품도 작품이지만 인품도 훌륭했던 모양이다. “첫인상이 매우 부드러웠습니다. 아주 겸손하고 자상하셨습니다. 언제나 드로잉을 먼저 강조하셨지요. 그 분의 강의에 학생들은 모두 넋을 잃곤 했습니다.(황영성)

“선생님은 ‘자신만의 색을 만들어야 한다’며 어떻게든 색채에 대한 자신의 안목을 전수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선생님과 늘 함께하면서 화가로서의 자세를 배웠습니다. 저 또한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영혼의 색채를 길어 올리기 위해 고뇌의 두레박을 가슴 깊은 곳으로 수없이 던지곤 했습니다.”(최영훈)

“제가 여고 2학년 때 선생님이 조선대학에 오셨어요. 당시 광주 화단에서는 대단히 큰 화젯거리였지요. 선생님은 당시 화가를 꿈꾸는 후학들의 로망이었으니까요. 그 깊고 아늑한 조형의 세계며 현란한 색채는 단연 우리 여고생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을 직접 뵐 기회가 있었는데 매우 친절하고 부드러우셨어요.”(정송규)

임직순은 사실주의를 거부하며 앙리 마티스의 절제된 표현과 피에르 보나르의 화려한 색채를 화폭에 담아내며 ‘색의 마술사’ 반열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임직순이 어떤 인물이었고 어떤 화가였는지 잘 알지 못한다. 오늘 이 글은 그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다. 더군다나 올해는 임직순 화백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 아닌가. 지금이라도 그를 기리는 어떤 작은 행동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후배들의 당연한 의무이자 도리일 터이니 말이다.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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