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향초대석-시의 길 40년 9번째 시집 출간 곽재구 시인
2021년 05월 04일(화) 08:00
“시를 꿈꾸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사평역에서’로 1981년 신춘문예 등단
최근 펴낸 시집 ‘꽃으로 엮은 방패’는
사회 고통·모순의 창칼 은유적 표현
하루 8만6400초 시와 연인으로 보내
길 위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 작품에 담아와
시 창작의 원동력은 시대적 아픔과 결핍

올해로 등단 40년을 맞은 곽재구 시인은 “삶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 시는 내가 좋아하는 순간을 내 방식대로 써내려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스무살 무렵 타고르 시를 처음 접했던 시인은 훗날 타고르의 고향인 산티니케탄을 찾아갔다. <곽재구 시인 제공>

간이역 톱밥난로의 온기와 해질녘 갯마을 포구의 노을, 모래톱 품은 맑은 강의 물살소리가 그의 시에 깃들어 있다. 스무살 무렵부터 오랜 시간 두발로 걸으며 만난 이들의 삶의 무늬와 숨결이 새겨져 있다. 시업(詩業) 40년을 맞아 최근 ‘꽃으로 엮은 방패’를 펴낸 곽재구(67) 시인을 만나 시 인생에 대해 들었다.



◇등단 40년 맞아 9번째 시집 ‘꽃으로 엮은 방패’ 펴내=“너무 홀가분하고, 마음 안에 부드럽고 따뜻한 봄물이 차가지고 찰랑찰랑하는 느낌이에요. 이제 쓰고 싶은 것을 다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인에게 올해는 뜻 깊은 해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사평역에서’로 등단한지 40년을 맞았고, 2001년부터 순천대 인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에서 시를 강의한 지 20년 만에 정년퇴직을 했다. 순천에서 살고 있는 시인의 ‘사평’과의 인연도 흥미롭다. 순천의 옛 이름은 ‘모래드리’ 또는 사평(沙平), 삽평(삽平), 평양(平陽) 등으로 불렸는데 1935~1940년 제방공사 전까지 옥천과 동천변에 드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최근 펴낸 9번째 시집 ‘꽃으로 엮은 방패’ 표제는 ‘우리 사회가 지닌 고통과 모순의 창칼을 막아내는 아름다운 방패’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이번 시집에는 ‘채송화’와 ‘江上禮雪(강상예설)’, ‘우슈토베의 민들레’, ‘늙은 시인은 새 시집 읽는게 두렵지 않다’ 등 시 71편과 문학적 자전(自傳)이자 시론(詩論)인 산문을 함께 실었다.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웃고 있군요/ 샌들을 벗어 드릴 테니/ 파도 소리 들리는 섬까지 걸어보세요.”(‘채송화’ 전문)

“…몬순에 꽃이 피네/ 꽃에서 엄마 냄새 나네/ 아지사이/ 아지사이/ 열일곱 우리 엄마/ 수국에 입 맞추네”(<수국>중)

신간 시집에는 짙은 서정과 근현대사를 바탕에 깔고 시인의 가족사(史)를 다룬 시 ‘수국’과 ‘중강진’ 연작 등 다채로운 시세계를 보여준다. 특히 시인이 좋아하는 김소월·백석·이용악 시인을 ‘하얀 조선의 밤’, ‘파수강 칠십리’, ‘용오름 마을’, ‘목도장1’ 등을 통해 오마주한다.

“눈사람 하나/ 초롱 들고 눈길 더듬어 오네/ 저고리 안 차가운 손바닥/ 파수강 갈잎차 한봉지 내미네/ 눈은 쌓이고 쌓여/ 천지에 이 동무 저 동무 다 그리운데/ 벗이여 날 밝으면/ 새하얀 눈길 북관까지 걷세나”(‘하얀 조선의 밤-소월에게’ 중)

시집에 함께 실린 산문은 ‘가난한 마을로 오는 푸른 기차’라는 제목 아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ㄱ에서 ㅎ, ㅏ에서 ㅣ까지 한글 자모 순서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추석 지나고 첫서리 내린 날 저녁 밥숟가락을 놓은 뒤’ 태어나서, 어떻게 시를 쓰게 됐는지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다산 정약용의 시구 “나는 본디 조선사람/ 기꺼이 조선 시를 써내야 해”를 예로 들며 ‘해체와 포스트 모던, 미래파와 난해시를 이야기 할때도 본질은 조선의 꿈 조선의 향기를 노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루 8만6400초를 시와 연인으로 지내=하루 8만6400초, 시인의 모든 시간은 시다. 찰라 같은 1초, 1초를 오롯이 시에 바친다. 주유소 담장위 핀 호박꽃을 보고 ‘시가 찾아 와’ 길가에서 깜빡이등을 켜고 시를 쓰는 시인과 ‘호박꽃이 좋아 시를 쓰는 중’이라는 시인의 말에 면허증을 돌려주는 경찰을 상상해보라. ‘자두꽃 핀 시골길’에서 그려지는 시인과 경찰의 정경은 슬며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시인이 즐겨 찾는 동천변 ‘카페 A’에서 만나 ‘8만6400초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시인은 시집을 펼쳐 “몸 안에 팔만 육천사백편의 쓰다 만 시가 있죠”라고 묘사한 ‘바람’의 시구를 읽어준다. ‘시쓰는 일을 생의 업으로 받아들였을 때’인 스무살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루 8만 6400초를 시 창작에 쏟아 부었다.

곽재구 시인이 그동안 펴낸 시집과 산문집을 접한 독자라면 그의 여행 편력(遍歷)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시인의 눈길이 닿고 발길이 머무른 산과 바다, 강, 들녘, 마을… 모든 공간이 활자마다 생생하게 꿈틀거렸다. 시인의 발걸음은 중국 대륙과 구 소련,미국, 유럽, 중앙아시아 고려인마을 ‘우슈토베’, 타고르의 고향인 인도 ‘산티니케탄’(Santiniketan) 등지로 이어졌다. ‘기행 시’는 그의 발에서 태어났다.

“내 삶의 발은 두 개 인데 한 발은 시(詩)고 한 발은 여행이다, 두 개가 동격이에요. 시와 여행, 두 발을 합치면 내 삶이잖아요. 시는 여행이고, 여행은 시죠. 한 발로 걸어가고, 한 발로 시 쓰고 이것이 내 삶이죠.”

또한 시인은 길 위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을 작품에 담아냈다. 한국 전쟁때 주인 아들대신 인민군과 국군을 오가야 했던 종손댁 큰 머슴을 주인공으로 한 ‘약천리 허상갑씨가 굴비식사를 하고 난 뒤’와 섬진강을 건너 옥과 입면에서 남원으로 주민들을 건너주던 뱃사공을 다룬 ‘나룻물 강생원의 뱃삯’, 1937년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을 주인공으로 한 ‘우슈토베의 민들레’, 진도 소리꾼 ‘조공례 할머니의 찢긴 윗입술’ 등은 새로운 ‘인물시’의 전형을 보여준다. 일찍이 첫 시집 ‘사평역에서’부터 권투선수 ‘김득구’, 시외버스 안내양 ‘조경님’, 동명동 청소부 ‘박득세’ 등 서민들의 애환을 담아왔다. 이번 시집에서도 바닷가 한 할머니의 억척스런 일생을 통해 가부장적 한국사회를 꼬집는 ‘파람바구 마을 弄珠(농주)’ 등 다채로운 인물시에도 ‘인간의 냄새’가 배어 있다.

◇가족사 담은 장편 서사시 집중할터=“평생 강물의 노래를 들었으나/ 자신의 노래를 부른 적 없는 이가 눈보라를 맞는다/ 피아노의 검은 건반이 하얀 눈보라 속에 묻힌다.”(‘징검다리’ 전문)

시인은 순천 시가를 가로질러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동천변을 산보하며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1990년대 말에 처음 찾았던 와온 포구처럼 요즘은 동천에서 시 창작의 동력을 충전한다. ‘미르’와 ‘미리내’로 이름붙인 두 개의 징검다리를 건너 한 바퀴 도는데 대략 1~2시간이 소요된다. 강물과 나무와 풀, 새, 물고기 등과 교감하다 걷다 시를 쓰고, 징검다리나 벤치에 앉아서도 시를 쓴다. 이번 ‘꽃으로 엮은 방패’와 2019년 펴낸 ‘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문학동네 刊)에 실린 많은 작품들이 동천에서 쓰였다.

시인은 동천에서 생명의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한다. 깊은 겨울 어느 날, 동천변 풀들이 다 시들었는데 벤치 아래 풀만 유독 초록빛인 것을 봤다. 나무의자가 지붕처럼 눈과 된바람을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이 사진을 몇 장 친구들에게 보냈는데 그중 한 친구는 부끄럽다고 말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영혼에게 작은 의자가 되어준 적이 있는가 생각했다는 것이다.”

곽재구 시인은 대학 연구년과 방학을 이용해 지난 2009년 7월부터 2010년 12월까지 540일 동안 타고르의 고향인 인도 산티니케탄에 머물면서 시를 썼다. 스무살, ‘문청(문학청년) 시절부터 염원했던 오래 묵힌 마음의 여행’이었다. 대학에서 처음 타고르 시를 접했을 때 ‘아! 이런 시의 세계가 있구나’ 싶었다.

타고르 시는 아이스크림이고, 꽃향기였다. 해가 뜨는 시간에 전교생이 모여 타고르의 시노래를 부르고, ‘자이구르!’(너의 스승에게 경배를) 라는 인사를 나누는 동네…. 맑은 눈망울과 따뜻한 마음을 지닌 그곳 사람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시인에게 시를 선물해 주었다. 그때로부터 30여년 만에 타고르 고향을 찾아 인도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보고 느낀 것들을 시와 산문에 녹여냈다. 인도를 다녀와서 개인적 또는 문학세계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나는 삶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 시의 정의는 내가 좋아하는 순간을 내 방식으로 써내려가는 것. 그런데 (써내려갈 때) 좋아하니까 좀 아름답고, 신비하고, 따뜻하게 쓰는 것, 이게 내 시의 정의에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우리 땅 뿐만 아니라 ‘지구별’ 곳곳을 돌아다니는 시인의 역마살에 대한 궁금증이 열쇠처럼 한 순간에 풀렸다. 앞으로도 가볼 곳이 많다. ‘코로나 19’가 풀린다면 당장 인도 친구들을 찾아보고 싶다. ‘나라가 하나가 되면 제일 먼저 함남 도안까지 기차표를 끓고’ 플랫폼에 내려 ‘쩔쩔 끓는 귀리차’(‘첫눈’ 중)를 마실 것이다. 또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떠나겠다는 ‘버킷 리스트’를 가슴속에 품고 있다.

시인은 40년을 이끌고 온 시 창작 원동력을 묻는 질문에 근원적인 힘인 ‘피’와 박정희 독재정권 아래에서 겪어야 했던 ‘시대적 아픔과 결핍, 억압’을 들었다. 데뷔작
‘사평역에서’도 그런 상황에서 쓰여졌다.

시인의 시와 산문에서 ‘스무살’이라는 표현이 유독 눈에 띈다. 시인을 견인한 또 다른 원동력은 ‘스무살’의 힘이다. 그때 읽었던 문학작품과 두발로 걸었던 발품이 시와 산문에 녹아있다.

“어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뿌리는 것이/ 별의 숙명이라는 것을 안/ 스무살 뒤로/ 나는 내 마음에게/ 어떤 외로움 속에서도/ 홀로 외로워질 수 있다고/ 고요히 다짐하는 버릇이 생겼다.”(‘또 하나의 별’ 중)

올해 등단 40년을 맞은 시인은 앞으로 어머니와 외가 식구들의 삶의 이야기를 다루는 장편 서사시를 마무리할 생각이다. 시인은 세상의 평가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좋아서 쓰고, 그런 시들을 독자들이 읽고 나서 위로받고, 새로운 꿈을 꿀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시인은 산문집 ‘길귀신의 노래’에서 “언젠가 지상에서 내가 쓴 허름하기 이를데 없는 글들이 한송이 포도와 같은 질감과 푸른 빛의 꿈을 지녔으면 싶다”고 밝혔다. 하루 8만 6400초를 꼬박 시만을 생각하는 시인의 또 다른 노래와 길 위에서 길어 올린 삶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시인은 시집 ‘꽃으로 엮은 방패’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시를 꿈꾸는 사람이에요/ 아침에도 시를 꿈꾸고/ 저녁에도 시를 꿈꾸는 사람이에요.”

/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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