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품은 ‘예술공간 집’
2021년 05월 25일(화) 08:00
‘기억’ 품은 한옥의 정체성 살린 기획전들 반향
독특한 형식 미술사 강의·체험 프로그램 인기
건축공간연, ‘가치를 잇는 건축자산활용’선정

광주 동구 장동에 자리한 ‘예술공간 집’은 수십 년 전 문희영 관장의 추억이 깃든 공간이라는 점에서 한옥을 매입해 개관한 여타 한옥갤러리와는 결이 다르다. 이같은 스토리는 최근 건축과 도시공간을 연구하는 건축공간연구원의 ‘가치를 잇는 건축자산활용’에도 선정됐다. <사진제공=예술공간 집>

광주시 동구 장동 전남여고 정문 앞 골목에 접어들자 가장 먼저 아담한 한옥이 나온다. ‘예술공간 집’. 통유리창 위에 내걸린 간판과 고풍스런 창틀이 정겹게 느껴진다. 모던한 분위기의 일반 갤러리에서 볼 수 없는 따뜻함이다. 이처럼 ‘예술공간 집’은 첫 인상부터 방문객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킨다.

낡은 형태를 그대로 살린 대문을 지나면 타임머신을 타고 70~80년대로 되돌아간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시원하게 트인 마당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화단이, 오른쪽에는 통유리로 마감한 전시장이 자리하고 있다. 전체 53평중 갤러리가 들어선 공간은 25평. 안방과 주방, 건넌방 등이 있던 곳이다. 마루 쪽에도 벽을 만들어 작품을 걸었다.

낡은 서까래는 세월의 흐름과 한옥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미닫이 문의 흔적과 주춧돌도 모두 그대로 뒀다. 그래서인지 마당 한 가운데 서 있으면 갤러리가 아닌 추억속의 집으로 들어온 듯 하다. 수십 년 전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예술공간 집’의 스토리는 최근 건축과 도시공간을 연구하는 건축공간연구원(AURI, Architecture & Urban Research Institute)이 출간한 ‘가치를 잇는 건축자산활용’(주택편)의 4곳에 선정되기도 했다.

예술공간 집의 1호 소장품인 조현택 사진작가의 ‘17번 방’
이처럼 예술공간 집이 특별한 이유는 ‘시간’을 품고 있다는 점이다. 근래 광주 예술의 거리나 양림동에 속속 개관한 한옥 갤러리들과는 결이 다른 지점이기도 하다. 이들 갤러리들이 매물로 나와 있는 한옥을 개보수했다면 예술공간 집은 주인장인 문희영(45) 관장이 실제로 10년간 거주했던 한옥을 보존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집은 제 인생에 있어 가장 감수성이 풍부했던 중,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곳이예요. 엄마에게는 오랜 셋방살이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마련한 집이라는 점에서 우리 가족에게는 매우 각별한 공간이었어요. 당시 열 네살이었던 나는 화가의 꿈을 꾸며 미술대학에 입학하기까지 늘 그림을 그렸어요. 대학교 4학년 되던 해, 다른 집으로 이사하면서 더 이상 이 집과 ‘인연’은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그녀가 이 집과 다시 만난 건 지난 2016년. 대학 졸업후 광주신세계 갤러리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했던 문 관장은 결혼과 육아 등으로 10년간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전업주부로 보냈다.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조금 여유가 생기자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공부에 대한 갈증이 되살아났다. 조선대 미술학과 대학원에 진학한 그녀는 박사과정 4학기 부터 큐레이션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하게 됐다.

통유리창이 인상적인 ‘예술공간 집’ 입구
“출산과 육아로 공백기를 보낸 탓인지 전시기획과 강의활동 하는 게 너무 즐거웠어요. 어느 날, 친정 엄마로 부터 ‘예전에 살던 한옥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당시 전세로 살던 세입자가 나가면서 빈 집이 되자 리모델링을 해야 할지, 새로 집을 지어야 할지 선택을 해야 했거든요. 워낙 오래된 집이라 관리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어요. 저는 고민도 하지 않고 ‘그냥 싹 밀어 버리고 새로 건물을 짓자’고 했는데, 엄마는 조금 망설이셨어요. 결혼 후 처음으로 어렵게 마련한 집이어서인지 어떻게든 옛 모습을 보존하고 싶어하셨거든요.”

그래서 생각해 낸 게 한옥 갤러리였다. 오래전부터 가슴에 품었던 ‘따뜻한 차를 마시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을 꾸미기 위해서였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지역 미술계에 의미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던 그녀는 시민들에게 좋은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는 플랫폼 역할을 하기로 한 것이다.

한옥의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전시장과 그 곳에 내걸린 작품들은 오래된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같다. 특히 전시장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사진작가 조현택의 ‘17번 방’은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수년 전 부터 나주, 함평, 광주 등에서 방치된 빈집을 카메라에 담아온 조 작가는 누군가 남겨 놓은 흔적이나 낙서, 커튼, 액자, 포스터 등을 재배치하고 집 밖의 풍경을 집 안으로 들여오는 ‘옵스큐라 방식’을 활용했다. 빛을 차단한 공간 벽에 바늘구멍을 뚫어 밝은 바깥 풍경이 맺히게 하는 촬영기법을 통해 실재와 환영, 어둠과 빛, 삶과 죽음이 어우러진 공간을 담아냈다.

통유리창이 인상적인 ‘예술공간 집’ 입구
이 작품은 문 관장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 지난 2017년 개관 기념전으로 개최한 ‘다시 호흡하는 시간’에 출품된 작품으로 문 관장이 예술공간 집을 개관한 이후 구입한 첫번째 컬렉션이기도 하다.

문 관장의 설명대로 예술공간 집은 기획전에서도 한옥이 지닌 정체성을 잘 살려내고 있다. 지역의 다른 갤러리들과 구별되는, 이 곳만의 색깔이다. 개관전 이후 3년 간 기획해온 전시회의 스펙트럼이 이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1년에 14~15회의 전시회를 진행하고 있는데, 자체 기획전 뿐만 아니라 대관전에서도 예술공간의 지향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개관전 ‘다시 호흡하는 시간전’은 이런 문 관장의 의도가 잘 드러난 전시다. 예전에 비해 지역 갤러리들이 수적으로 많아졌지만 미술계에서의 존재감이 미미한 현실에 안타까워하던 그녀는 좋은 작품들을 소개하는 데 포커스를 맞췄다. 또한 예술공간 집의 남다른 기획력을 보여준 전시는 ‘전시실 너머 실험실’(2020년)과 ‘신·구 작가전’(2018~2021년)이다. 이 가운데 ‘전시실 너머 실험실’전은 중견작가들의 변신을 응원하는 독특한 콘셉트의 전시다.

이처럼 예술공간 집은 개관 이후 3년 만에 차별화된 콘셉트와 주제로 지역 사회와 소통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특히 ‘아트 브런치’ 형식의 미술사 강의, 소규모 강좌, 체험 프로그램 ‘아트클래스’ 등은 예술공간 집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지역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많다. 우리 미술사에서 제대로 조명받고 있지 못한 작가들과 흐릿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들을 새롭게 복원해내고 싶어서다.

“예술공간 집은 좋은 그림을 보여주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작은 갤러리들이 꾸준히 유지하는 곳이 그리 많지는 않지요. 자금상의 어려움도 있겠지만 누가 운영을 하느냐, 어떤 기획자가 있느냐에 따라서도 존폐가 달라지는 것 같아요. 차별성을 갖고, 소규모이지만 기획의 힘이 느껴지는, 광주의 ‘학고재’ 같은 갤러리가 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든지 ‘버텨내는 게’ 가장 절실한 목표예요”(웃음).

/박진현 문화선임기자 jh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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