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예향-배국남의 대중문화 X파일
2021년 06월 01일(화) 06:30
70~80대 노배우는 무엇으로 사는가
한국배우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 조연상을 품에 안은 배우 윤여정.
“나는 한국에서 온 윤여정이다. 직접 이 자리에 오게 돼 믿을 수가 없다. 나에게 투표를 해준 아카데미 회원들에게 감사하다. ‘미나리’ 가족들에게도 감사하다.”

1980년대 미국으로 이주해 농장을 일구며 정착하는 한인 가정 이야기를 다룬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에서 할머니 순자 역을 연기해 4월 25일(미국 시각) 열린 제93회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의 수상소감이다. 한국배우로는 최초, 아시아 배우로는 1957년 ‘사요나라’의 일본계 미국인 우메키 미요시에 이어 두번째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한국 영화사뿐만 아니라 세계영화사를 새로 쓴 윤여정은 74세의 배우다.

윤여정은 1966년 TBC 탤런트 공채를 통해 연기자로 데뷔해 1970년대 걸작으로 평가받는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 ‘충녀’의 주연으로 활약했고 1990년대 중국 한류를 촉발하며 60%대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와 ‘목욕탕집 남자들’ 인기를 견인한 것을 비롯해 50여 년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치열하게 연기해온 명배우다.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윤여정, 강부자
한국 직장인의 일반적 퇴직 연령은 60세지만 은퇴 나이가 한참 지났음에도 의미있는 성취와 가치 있는 성과를 거두며 현역으로 활동하는 70~80대 배우들이 있다.

대중문화계는 젊음을 가장 많이 선호하고 왕성하게 소비하는 곳이다. 문화 상품의 강력한 소비층인 10~20대에게 소구하는 10~30대 젊은 스타들이 대중문화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배우 특히 여배우는 결혼하고 40~50대에 접어들면 주연 자리에서 밀려나고 60~80대 연기자는 밥 먹는 장면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식탁용 배우’로 전락한다.

대중 취향과 미디어 환경의 급변으로 스타의 순환 주기도 짧아지면서 인기 절정의 스타도 이내 대중의 시선에서 사라지기 일쑤다.

이런 상황에서 윤여정처럼 50~60년 오랜 기간 드라마와 영화, 연극에 출연하며 대중문화계를 이끄는 70~80대 연기자들은 후배들에게 나이 먹어도 배우를 하고 싶게 만드는 이상적 본보기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문제이자 불행인 젊은이들이 사표로 삼을 진정한 어른 부재의 공백을 메우며 바람직한 어른 롤모델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



나문희, 영화 아이캔스피크
작품을 통해 펼치는 70~80대 배우들의 활약은 젊은 스타 못지않다. 나문희는 2017년 76세에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통해 생애 처음 청룡상 여우주연상을 비롯한 영화제의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나문희는 3월 22일 시작한 tvN 드라마 ‘나빌레라’와 지난해 관객과 만난 영화 ‘오! 문희’, 2019년 상연된 연극 ‘친정엄마’를 비롯한 드라마와 영화, 연극에서 주·조연으로 나서며 인간의 심연까지 드러내는 광대한 연기력으로 인생의 의미와 감동을 전하는 60년 경력의 80세 배우다.

안성기,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
광주 민중항쟁을 다룬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 주연으로 출연한 안성기는 노년이라는 단어 자체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맹활약하는 70세, 그것도 1957년 영화 ‘황혼 열차’로 데뷔한 이후 60여 년 연기해온 우리 시대 최고의 배우다. 한국 영화사를 수놓은 ‘바람 불어 좋은 날’, ‘만다라’, ‘남부군’, ‘실미도’,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 160여 편의 영화를 통해 한국 영화의 위상을 격상시키며 1000만 관객 영화 시대를 이끈 주역이 안성기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넘어’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연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해 65년째 드라마와 영화, 연극 무대를 지키는 이순재는 후배 연기자들에게 사표가 되는 87세 노배우다. 이순재는 1962년 KBS 최초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다’와 한류를 촉발한 ‘사랑이 뭐길래’, 64.8%로 사극 시청률 1위에 오른 ‘허준’ 같은 최초·최고 작품에 출연하며 한국 드라마 역사를 써왔다.

김혜자 영화 마더
1962년 KBS 1기 탤런트로 연기를 시작한 80세의 김혜자는 60년 동안 드라마 ‘개구리 남편’, ‘전원일기’, ‘사랑이 뭐길래’, ‘엄마가 뿔났다’, ‘눈이 부시게’와 영화 ‘만추’, ‘마더’ 등에서 작품의 성격과 느낌마저 규정하는 접신의 경지에 이른 캐릭터 표출력과 연기력으로 드라마와 영화의 발전을 견인했다.

1965년 국립극단 단원으로 연기자로 입문한 80세의 최불암은 ‘전원일기’ ‘수사반장’ 같은 한국 방송사에 남을 드라마의 주연으로 나서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좌절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을 안기며 인생의 좌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드라마 장르와 포맷의 지평을 확장한 스타다.

70세의 고두심은 대다수 연기자가 방송사 연기대상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배우생활을 마감하는 상황에서 1972년 연기를 시작해 본능에 가까운 동물적 감각으로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탈개성화 한 연기력으로 드라마의 완성도와 시청률을 높이며 KBS에서 세 차례, MBC에서 두 차례, SBS에서 한 차례, 방송 3사에서 여섯 번의 연기 대상을 받는 전인미답의 대기록을 세웠다.

이들 외에도 신구(85), 오현경(85), 김영옥(84), 박근형(81), 김용림(81), 강부자(80), 정혜선(79), 반효정(79), 백일섭(77), 이정길(77), 주현(77), 박인환(76), 손숙(76), 임현식(76), 김용건(75), 선우용녀(75), 정영숙(74), 박원숙(72), 김수미(72), 한진희(72), 임채무(72), 정동환(72), 윤주상(72) 같은 연기 경력 50년이 넘는 70~80대 배우들이 주역으로 스크린과 TV 화면, 그리고 연극무대를 화려하게 수놓고 있다.



백일섭. 영화 두근 두근 내인생
배우의 생명력을 좌우하는 인기와 흥행파워가 급변하고 젊은 스타들이 장악하고 있는 대중문화계에서 50~60년 긴 세월 드라마와 영화, 연극의 주역으로 활동하는 70~80대 배우의 경쟁력은 무엇일까.

최근 들어 중장년 대중의 문화 상품 소비가 늘어나고 인터넷, 디지털의 발전과 유튜브, 넷플릭스, 페이스북 같은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와 SNS의 대중화로 미디어와 대중문화 생태계가 변한 것이 70~80대 배우의 활동 토대가 됐지만, 무엇보다 배우 입문부터 오랜 시간 작품을 통해 자기 혁신을 꾀한 것이 70~80대 배우의 가장 큰 경쟁력이다.

70~80대 현역 배우를 관통하는 것은 신인 때부터 치열하게 연기하면서 연기 역량을 키워왔다는 점이다. 젊은 시절 스타라는 명성에 안주해 자신을 부단히 연마하지 않아 연기의 상투성과 전형성을 드러내는 연기력 부족의 노배우도 적지 않지만, 드라마와 영화의 주역으로 나서는 70~80대 배우들은 데뷔 이후 50~60년 동안 지속해서 ‘작은 배역은 있어도 작은 배우는 없다’라는 신념으로 캐릭터 비중에 상관없이 연기에 전부를 걸며 연기 스펙트럼 확장을 위해 땀을 쏟았다.

70~80대가 된 지금에도 나이와 경력, 명성, 중견 스타라는 지위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하는 연기 트렌드를 공부하고 새로운 연기 스타일을 구축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관객과 시청자에게 감동을 주는 연기는 왕도가 없습니다. 오랜 시간 연습하며 흘리는 땀만이 필요할 뿐입니다”라는 나문희는 60년 연기 경력에도 “연기가 좋아졌다”라는 말을 가장 큰 찬사로 받아들인다.

“현실에 안주하고 같은 연기만 반복했다면 괴물 같은 사람이 됐을 겁니다”라며 늘 새로운 캐릭터에 도전해 지속해서 연기력을 진화시킨 윤여정은 “학교에서 연기나 영화를 공부하지 않아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본을 받았을 때 정말 열심히 연습했습니다”라고 밝혀 오늘의 성취는 치열한 노력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고두심, 영화 빛나는 순간
스타성과 인기, 수입의 배가보다 작품에 전부를 거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도 70~80대 명배우들의 공통점이다. 김혜자는 “작품에 들어갈 때 필요한 것은 스타성도 인기도 아닙니다. 연기에 대한 열정과 출연 작품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만이 요구됩니다”라고 강조한다. 연기는 직업이 아니라 자신의 전부라는 김혜자는 영화와 드라마에서 가장 김혜자다운 동시에 또 다른 김혜자를 선보이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안성기는 영화에 전력을 기울이기 위해 촬영 전날 뛰지도 않고 빨리 걷지도 않고 큰소리도 지르지 않으며 숨 하나라도 아껴두는 철저한 자세를 견지하기로 유명하다. 이런 안성기로 인해 한국영화의 작품성을 높이는 실험적 장르와 독창적 캐릭터가 탄생했다.

영화와 드라마는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닌 많은 연기자와 스태프가 함께하는 공동 작업이다. 이 때문에 작품에 임할 때 스태프를 배려하는 자세와 동료 연기자와의 원활한 소통이 요구된다.

하지만 일부 젊은 스타는 인기를 무기 삼아 그리고 장노년 연기자는 나이와 경력, 명성을 권력 삼아 일방적인 주장을 펼치며 문제 있는 행태를 보인다. 심지어 일부 장노년 연기자는 젊은 배우들에게 갑질마저 서슴지 않는다.

이순재, 영화 덕구
의미 있는 성과를 내며 활동하는 70~80대 배우들은 현장에서 젊은 배우들과 수평적 소통을 하며 원로 배우가 아닌 배우의 한 사람으로 작품에 임한다.

이순재는 “60년 넘는 세월 동안 드라마나 영화 현장에서 특별대우를 요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촬영장에 가면 원로 배우가 아닌 한 명의 연기자일 뿐입니다”라고 했고 최불암은 “젊은 배우와 스태프에게 작품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배웁니다. 나이와 경력이 대화나 배움의 장애가 돼서는 안 되는 직업이 바로 배우입니다”라고 강조한다.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 출연한 주현 박원숙 윤여정 김혜자 고두심 고현정 김영옥 나문희 신구(왼쪽부터).
“늘 책을 읽고 다른 사람 말을 듣는 연습을 해라. 삶의 태도가 민주적이어야 한다. 나이라는 권력으로 쇠한 것을 메우려고 하면 안 된다. 나이 들수록 듣는 연습을 해야 하고, 토론을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게 바로 노망든 것이다. 배우기를 그치지 말고 참신하게 생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황현산 전 고려대 교수가 적시한 현명한 어른 되는 법이다. 현역으로 활동하며 영화와 드라마의 흐름을 주도하는 윤여정 나문희 안성기 같은 70~80대 노배우들은 제작 현장에서 바로 황 교수가 언명한 것들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다.

연기에 대한 열정과 실력 그리고 노력으로 물리적 나이를 무력화하는 70~80대 연기자들은 화려한 경력과 수입, 인기를 좋아하고 스크린과 TV 화면 밖에서 살아나는 배우가 아닌 영화와 드라마를 사랑하며 스크린과 TV 화면 속에서 진정으로 살아나는 배우이기에 값진 성취를 하며 현역 연기자로 맹활약하는 것이다. 물론 ‘25세에 죽어버리면서 장례식은 75세에 치르는 사람’ 같은 노배우도 적지 않지만, 이순재 김혜자 최불암 고두심처럼 70~80대 나이에도 젊은 스타보다 더 치열하게 노력하고 더 강렬하게 연기하며 작품을 빛내는 명배우들이 있다. 그래서 우리 영화와 드라마가 진일보한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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