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개척단, 그 배후에 있는 폭력을 생각하며-정근식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2022년 05월 31일(화) 00:15
며칠 전에 서산에 사는 윤씨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할머니는 해남이 고향이었다. 지금으로부터 59년 전인 1963년, 그녀는 서울에 사는 사촌 언니 집에 놀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서울역 부근에서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수예 학원에 보내준다고 했는데 도착한 곳은 ‘서산 자활개척사업장’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그녀는 속은 것을 알았지만 통제가 엄격하고 무서워 도망칠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9월 26일, 125쌍의 서산개척단원 합동결혼식이 열렸을 때, 그녀는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면사포를 썼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1964년 11월, 서울시장 주례로 225쌍의 합동결혼식이 워커힐에서 열렸는데, 좀 더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하여 1년 전에 결혼했던 사람들 다수가 다시 동원되었다. 당시 언론들은 이 신부들이 한때 윤락 여성이었으며 “서울시립 부녀보호지도소에서 재생한 여성들이다”고 보도했다. 할머니는 그렇게 국가와 언론이 씌운 굴레와 낙인에 평생 괴로워하며 살았다.

한국 현대사에서 사회악 일소나 사회 정화라는 용어는 별로 낯설지 않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980년 5·18 직후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가 발표했던 삼청계획 5호였다. 이것은 사회 정화와 사회악 일소를 명분으로 한 ‘불량배 소탕 계획’이었는데, 이는 1961년 5·16 직후의 국토건설단을 참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1년 5·16 직후 군사정부는 사회악 일소를 내세워 깡패나 부랑자들을 대대적으로 단속했다. 깡패들에 시달리던 일부 시민들은 환영했지만, 법적 근거도 없었을 뿐 아니라 잡혀간 사람들 중에 ‘선량’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들에게는 국토건설단이나 서산개척단과 같은 고상한 이름이 주어졌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군사정부는 1961년 7월 12일 서울의 부랑아 정착 사업으로 450명을 대관령으로 보냈다. 현지 수용소 감독관은 최고회의가 지명한 장교였고, 수용소 경비 책임은 군 헌병이 맡았다. 뒤이어 11월에 서산개척단이 발족했다. 이들은 종종 ‘대한청소년개척단’이라고도 불렸는데, 이의 뿌리는 1961년 5월 1일, 청계천의 한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출범한 ‘대한청소년기술보도회’였다. 5·16 쿠데타 이후 이들의 리더였던 김춘삼이나 민정식이 군사정부와 연이 닿으면서 군사정부의 사업이 되었고, 중앙정부도 개입했다. 바로 뒤이어 장흥개척단이 만들어졌다. 1962년 2월 서산개척단에 2진이 도착하고 폐염전을 개간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1963년에는 100여 명의 여성들도 잡혀 왔다. 그 후 계속 인원이 증가하여 1700명에 이르렀다. 초기 간부들은 불량배 출신들이 많았지만, 이들의 중심은 피난민이나 전쟁고아, 도시 주변의 가난한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강제로 잡혀가 낯선 곳에서 두들겨 맞으면서 일을 해야 했다. 이들에게는 개간이 완료되면 3000평의 농지를 분배한다는 약속이 주어졌지만, 도망자들이 속출했다.

1966년 6월, 일부 젊은이들이 조회 시간에 들고 일어나 기존의 지도부를 쫓아냈다. 이들은 이 사건을 서산개착단의 ‘자유화’ 또는 ‘해방’이라고 부른다. 이들 800여 명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당시 정부가 개척단 사업에 사용해야 할 비용을 어떻게 유용했는지를 묻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1968년 7월, 정부는 ‘자활지도사업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하여 개척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한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서산에서는 토지 가분배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분배를 집행할 시행령이 제정되지 않았다. 1982년 12월 법률이 폐지되면서 약속된 무상 분배도 무산됐다.

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진실화해위원회는 서산간척단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 결정을 하였다. 진실 규명 신청 1년 반만에, 조사 개시 1년만에 내린 결정이었다. 위원회는 감금, 폭행, 강제 노역, 강제 결혼 등에 대한 적절한 피해 보상과 함께 “국가는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강제 수용 및 강제 노역, 폭력 및 사망, 강제 결혼 등 신청인의 인권을 침해한 점에 사과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사실 이런 진실 규명이 있기까지 피해 당사자들의 끈질긴 요청과 뜻 있는 언론인, 문화운동가들의 노력이 있었다. 다큐멘터리 영화도 만들어졌다. 위원회의 진실 규명이 늦기도 했지만, 할머니의 고통을 모두 치유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성과를 영전에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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