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만의 가정방문-김진구 일신중 교감
2022년 06월 29일(수) 00:30 가가
가랑비 같은 잔디가 현무암 디딤돌을 감싸고 있는 마당이다. 흰 벽돌집이 만발한 수국과 함께 우리 내외를 맞이했다. 많은 분들이 꿈꾸는 전원주택이 그곳에 있었다. 병풍산과 삼인산이 마주한 여유로운 자리. 제자 오광삼의 담양 수북에 있는 집이다. 지난 주말 점심 초대를 받았다. 근처에 이름난 식당도 많은데 집에서 먹자고 한다. 고등학교에서 근무할 때 춘삼월 가정방문 기간이면 학생들을 우리집으로 불러 한솥밥을 먹었다. 그래서 35년 만에 제대로 가는 가정방문인 셈이다. 나는 간혹 거꾸로 선생이었다.
건한 점심상이었다. 고기와 병치 조림이 높직한 대들보 아래 차려졌다. 옆집, 앞집에서 주고받은 상추를 비롯하여 양파, 마늘, 파김치 등 동네 인심도 함께 상 위에 올라왔다. 그러나 입맛은 없었다. 마음이 들뜨니 그냥 배가 불렀다. 평안하게 잘사는 자식 집에 온 것 같았다. 밥상보다 노출 황토 벽돌의 거실 분위기가 좋았다. 순환기내과 전문의로 국립대 총장을 역임한 분은 이웃집 아저씨가 되어 잔디밭에 한가로웠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노교수에게 소주잔을 올리며 인생을 배운다는 두어 평 남짓 정자에 남은 오후를 두고 떠나왔다.
이 제자는 고등학교 때 담임을 맡았고, 주례도 보았다. 신부는 남매를 잘 키운 중년이 되어 주례사 한 토막을 되돌려 주었다. 그러고는 “제가 밥 좀 한다”면서 남편 반창회 때 함께하자고 했다. 제자들 주례는 30대 중반에 시작했다. 막걸리 두 되가 약정된 답례품. 저렴한 주례비가 소문났는지 30여 차례 주례를 맡았다. 동안(童顔) 처리가 가장 힘들었다. 나이 들게 보이려고 머리칼을 각지게(그때 용어로 고데) 다듬어 주기를 이발사에게 부탁했었다. 주례사 할 때는 마이크로 얼굴을 가릴 수 있었지만 기념사진 찍을 때는 완전 노출이었다. 지금은 주름과 나이가 상당한데 주례 부탁이 끊겼다.
이제 퇴임사를 쓸 시간이 다가온다. 공립 고등학교에 발령받아 근무하다가 사립으로 옮겼다. 다시 공립, 국립을 거쳐 교육청까지 건너다니면서 이임사를 많이 했다. 이번에는 교직을 마무리하는 퇴임사다.
“취임사는 꿈으로 쓰고, 퇴임사는 발자취로 쓴다.” 교장 자격 연수를 비롯하여 여러 연수에 가서 강조한 말인데 막상 내 퇴임사를 쓰려니 흔적이 많지 않다. 절절한 사연이나 발자취 대신 몇 가지 문장이 남은 것 같다.
“19세기 환경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 학생을 가르친다.” 1987년 학교 신축 평당 비용이 13만 6천 원으로, 교도소 짓는 비용보다 못할 때 교사신문에 제목으로 쓴 문장이다. 전국에 회자되다가 세기가 바뀐 뒤로는 구호로만 남아 있다. 환경도, 교사도, 학생도 많이 변하고 좋아졌는데 20센티 높이의 교단은 사라진 지 오래다.
“국·영·수로 힘들게 시작한 인생, 음·미·체로 마무리해야 즐겁다.” 가는 곳마다 동료, 후배들에게 놓고 쓰는 말이다. 길어진 노후의 석양 앞에 실천할 만한 다짐이 아닌가 생각한다. 강변 억새길 은빛 자전거이거나 한 컷 사진 한 장 첫새벽 출사(出寫)도 좋고, 안주머니 하모니카 하나로도 덜 쓸쓸할 것이다.
노랑 금성여객을 타고 이불 보따리에 몸을 기대면서 찾아갔던 비포장 교직의 길. 첫 출근 3일째 되던 날, 선배 선생님이 소록도가 안주처럼 떠 있는 녹동항에서 저녁을 사주셨다. “이제 여러 학교를 돌아다닐 것인데 발령받아 떠난 뒤에도 자네의 입장을 대변해 줄 한 명은 남겨야 하네.” 신출내기를 앞에 두고 다독여 줬던 노교사의 목소리는 지금도 출렁이는데 나의 허물을 덮어 줄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큰 선거가 두 번이나 있었기에 임무 교대가 한창이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온갖 벼슬이나 지위를 누리고 떠나면서 여기저기 인터뷰나 퇴임사에 마중물이 되고 싶다고 한다. 구정물 같아 보이는데 말이다. 마중물은 눈빛 같고, 구정물은 눈물 같다. 마중물은 끌어안을 때 붓고, 구정물은 내쫓을 때 끼얹는다. 역할이나 사회적 수명이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마중물로 착각해서 어떤 역할을 또 하겠다고 한다. 저리도 잊히는 것이 두려운가 보다. 내려놓기가 어려운가 보다. 구정물은 정화를 기다리는 것이 순리다.
“취임사는 꿈으로 쓰고, 퇴임사는 발자취로 쓴다.” 교장 자격 연수를 비롯하여 여러 연수에 가서 강조한 말인데 막상 내 퇴임사를 쓰려니 흔적이 많지 않다. 절절한 사연이나 발자취 대신 몇 가지 문장이 남은 것 같다.
“19세기 환경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 학생을 가르친다.” 1987년 학교 신축 평당 비용이 13만 6천 원으로, 교도소 짓는 비용보다 못할 때 교사신문에 제목으로 쓴 문장이다. 전국에 회자되다가 세기가 바뀐 뒤로는 구호로만 남아 있다. 환경도, 교사도, 학생도 많이 변하고 좋아졌는데 20센티 높이의 교단은 사라진 지 오래다.
“국·영·수로 힘들게 시작한 인생, 음·미·체로 마무리해야 즐겁다.” 가는 곳마다 동료, 후배들에게 놓고 쓰는 말이다. 길어진 노후의 석양 앞에 실천할 만한 다짐이 아닌가 생각한다. 강변 억새길 은빛 자전거이거나 한 컷 사진 한 장 첫새벽 출사(出寫)도 좋고, 안주머니 하모니카 하나로도 덜 쓸쓸할 것이다.
노랑 금성여객을 타고 이불 보따리에 몸을 기대면서 찾아갔던 비포장 교직의 길. 첫 출근 3일째 되던 날, 선배 선생님이 소록도가 안주처럼 떠 있는 녹동항에서 저녁을 사주셨다. “이제 여러 학교를 돌아다닐 것인데 발령받아 떠난 뒤에도 자네의 입장을 대변해 줄 한 명은 남겨야 하네.” 신출내기를 앞에 두고 다독여 줬던 노교사의 목소리는 지금도 출렁이는데 나의 허물을 덮어 줄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큰 선거가 두 번이나 있었기에 임무 교대가 한창이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온갖 벼슬이나 지위를 누리고 떠나면서 여기저기 인터뷰나 퇴임사에 마중물이 되고 싶다고 한다. 구정물 같아 보이는데 말이다. 마중물은 눈빛 같고, 구정물은 눈물 같다. 마중물은 끌어안을 때 붓고, 구정물은 내쫓을 때 끼얹는다. 역할이나 사회적 수명이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마중물로 착각해서 어떤 역할을 또 하겠다고 한다. 저리도 잊히는 것이 두려운가 보다. 내려놓기가 어려운가 보다. 구정물은 정화를 기다리는 것이 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