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힘든 이별-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수필가
2022년 09월 04일(일) 22:00
꾸벅 인사하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누구라고? 몇 번을 되묻곤 깜짝 놀랐다. 그가 내민 손을 잡을지 말지 망설였다. 처음엔 어색했으나 이내 따뜻했다. 시골집을 고치고 있었다. 약간의 설계 변경과 자잘한 도움은 행정기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가 그 업무를 담당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잘 지원해 준다 싶어 감사를 표하고 싶었는데 그였다. 나는 녀석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날 귀가하면서 많은 것을 되돌아보았다. 그는 이웃집 친구 아들이다. 친구는 그 아들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학창 시절엔 패싸움이 일상이었고 사춘기 때는 여자들을 괴롭혔다. 자라서는 경마나 도박에 빠져 늘 고주망태였다. 녀석이 입대하고 며칠 뒤 친구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뒤 녀석 소식은 영영 끊어지고 말았다. 가끔 친구를 생각하면 녀석에 대한 미움이 치밀었다.

주변 평판을 들어보니 놀랍게 호평이 많았다. 지난 삶을 성찰하고 두 배 세 배로 바르게 열심히 살려고 한다고 했다. 어머니에게도 각별하단다.

폐인이다시피 한 녀석을 누가 바뀌게 했을까. 아니 녀석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궁금했다. 기적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간혹 학창 시절 악당으로 기억하는 친구, 마을에서 망나니짓을 일삼던 이나 양아치처럼 굴던 사람이 개과천선한 경우를 보는 때가 있다. 그런데도 그 사람 뒷모습에는 그의 과거가 어른거려 좀처럼 그에 대한 시각이 변하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내 기억이나 시각이 강렬하거나 지나치게 내 중심적이어서 나를 어떤 틀 안에 가두고 보기 때문인지 모른다. 일종의 잘 알지 못하면서도 그 사실조차 모르는 인지 편향(Illusion of Knowledge) 상태. 잘 안다는 착각, 상대방은 예전 그대로가 아닌데 나는 상대방을 예전 그대로 인식하고 있는 내 착각 말이다.

이쯤 되면 슬슬 나를 돌아봐야 한다. 내 고정 관념과 편견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나만 옳다고 우기는 것은 아집이자 오만이다.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만들지만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미워하게 만든다지 않던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를 바꾸는 일이다. 나를 나로부터 떼어내어 저만치 세워 놓고 바라본다면 의외로 참 나를 볼 수 있다. 때때로 타인의 시각으로 ‘보이는 자아’와 지금 자신의 시각으로 ‘보는 자아’를 분리하여 볼 필요가 없지 않다.

나의 관점에서 벗어날 때, 세상은 훨씬 넓고 크게 보인다. 중년 남자들은 마음에 산과 강 하나씩 품고 산다. 세속에서 벗어나 자연에선 훌훌 자유로울 것으로 생각한다. 실상 마음에 욕심을 버리면 지금 사는 장소가 천국이고 심산유곡인 점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그 관념에 속박되어 살아가는 게 인간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늘 나일 경우가 많다.

나를 버리는, 자아와 헤어지는 일은 힘이 든다. 슬며시 가랑비에 옷이 젖듯 나와 이별하고 타인의 생각, 새로운 세상에 스며들 듯 마음을 내밀어 보자. 나를 버리고 네가 되어 보고 나무가 되어 보고 산이 되어도 본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이별, 나와 헤어지기로 마음을 다잡아 본다.

열매를 위해 꽃이 지듯, 새봄을 위해 떨어지는 낙엽처럼, 나를 버린다. 죽을힘을 다해 강물을 오르는 은어는 살기보다 죽기 위해 오른다. 자기를 버릴 때, 비로소 은어는 새끼 은어로 자신의 생을 잇고 새로운 자기로 태어난다.

나를 훌훌 떠나보낸다. 새 날개를 얻기 위해 민들레 홀씨처럼 훌훌 내 집착 내 관념으로부터 나를 떠나보낸다. 그렇게 나와 헤어져 새로운 나와의 만남을 준비하는, 가장 힘든 이별, 그때가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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