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경혜의 호남 극장 영화사] 일제강점기 전기와 함께 영화 등장 … 경이로운 문화 경험
2024년 04월 17일(수) 19:55 가가
<1> 전기의 도입과 극장의 불빛
1903년 한국 최초 영화 상영…동화 10전에 ‘활동사진’ 관람
광주 첫 극장은 300석 ‘광주좌’…일본인 이주민 다다요시 소유
광주극장, 1935년 조선인이 개업…조선인 결집 기능 역할도
1903년 한국 최초 영화 상영…동화 10전에 ‘활동사진’ 관람
광주 첫 극장은 300석 ‘광주좌’…일본인 이주민 다다요시 소유
광주극장, 1935년 조선인이 개업…조선인 결집 기능 역할도


지역에서 근대 극장의 등장은 일본제국의 지배와 함께 그 역사를 시작하였다. 일본인이 주인이었던 제국관에서 출발한 동방극장. 이후 무등극장을 거쳐 무등시네마가 되었다. 출처:위경혜 ‘광주의 극장 문화사’(도서출판 다지리, 2005.)
1903년 근대 한국 사회 최초로 동대문 한성전기회사 기계 창고에서 당시 활동사진으로 불린 영화가 상영되었다. 비 내리는 날을 제외하고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조선과 구미 각국의 모습을 동화(銅貨) 10전을 받고 보여주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현금 대신에 빈 궐련 담배 케이스 10개가 입장료를 대신하였다. 곰방대를 이용해 담배를 피우던 시절 한미연초주식회사의 궐련 판촉을 위해 영화를 이용한 것이다. 조선인에게 매혹적으로 다가온 전기와 영화 그리고 담배는 실상 개화기 조선이 서구 제국과 식민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과정을 상징하였다. 그래서인지 1907년 한성에서 조선 민간인이 최초로 설립한 극장인 단성사는 운영 방침에 조선인 교육과 자선을 포함하였다.
광주지역의 경우 영화 상영의 필수 전제 조건인 전기의 도입은 탐진 최씨 집안의 최원택과 인연이 깊다. 그는 1906년 한성농공은행 광주지점과 1907년 전국 최초의 금융조합인 광주금융조합을 설립하였다. 무엇보다도 1917년 거액을 들여서 광주전등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감사 역할을 맡았다. 전기는 병원과 감옥 그리고 우체국과 같이 광주의 도시 기반 시설을 확립하는 데 우선 도입되었지만, 영화의 등장에도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같은 해 지역 최초로 근대 극장 광주좌(光州座)가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전기의 도입은 ‘경이로운’ 사건이었으며 식민자로서 광주로 이주한 일본인에게 ‘격세지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일본인 후지가와 다다요시는 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광주좌의 문을 열었다. 전기와 함께 등장한 영화는 지역 조선인에게 마찬가지로 충격적인 경험이었을 것이다.
신문물을 소개한 최원택은 일제 지배 아래 조선인 교육에도 관심을 보였다. 1927년 탐진 최씨 문중이 전국 유림의 호응을 얻어 무양서원(武陽書院)을 건립할 때 거금을 희사했기 때문이다. 무양서원은 명현(名賢)의 제사를 모시고 후학의 교육을 담당한 곳이었다. 전기와 같은 서구 발명품의 도입과 학교 설립을 통한 조선인 계몽의 확대는 일제강점기 유지(有志)로 불린 조선인 엘리트에게 요청된 사업이라는 점에서 최원택의 결정은 마땅한 행보였다. 앞서 종로에서 모인 조선인 실업가들이 단성사를 설립하면서 흥행을 넘어 계몽을 포함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기 때문이다.
광주좌의 설립에서 볼 수 있듯이 근대 극장의 등장은 제국의 지배와 함께 그 역사를 시작하였다. 1927년 지역 최초의 상설 영화관 광남관(光南館)이나 광남관 후신으로 알려진 제국관의 주인은 일본인이었다. 1935년 광주극장이 개관하기 이전까지 지역 극장의 관주(館主)는 모두 일본인이었다. 제국관은 경찰서와 법원과 같은 행정 기관이 몰린 본정(本町, 현재 충장로 1가)에서 문을 열었다. 건물 상하층과 장외까지 포함해 총 7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흥행장이었다. 서양영화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영화사 동보(東寶)와 신흥(新興)의 작품을 배급받아서 상영하였다.
영화사 목록에서 알 수 있듯이 제국관은 일본인을 우선 고려한 종족(ethnic) 차별적인 공간이었지만 관공서 근무자와 같은 일본어 해독 능력이 있는 조선인들도 입장 가능하였다. 경성과 비교하여 광주의 영화 소비 시장이 상대적으로 작았기 때문에 일본인에 한정한 극장 운영은 수지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제국관이 일본인과 조선인을 섞은 혼종(混種)의 공간이었던 사실은 극장 프로그램에 조선영화의 흥행작을 포함하였기 때문이다. 1930년 3월 26일 저녁 8시 700여 명의 관중이 ‘아리랑 후편’(이구영, 1930)을 관람하던 도중 이웃집에서 발생한 화재를 영사실 화재로 오인하면서 관객들이 대피한 사건이 ‘중외일보’를 통해 알려졌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최대 흥행작 ‘아리랑’(나운규, 1926)의 후속편이자 당대 최고 스타 나운규가 출연한 영화를 일본인 극장에서 상영한 것은 종족의 혼재를 보여준 지역 도시 극장의 모습이었다.
조선인에 의해 조선인 중심지 충장로 5가에서 문을 연 광주극장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다. 1935년 10월 10일 광주극장의 개관 기념 작품은 ‘일상월상(日像月像, じつぞうげつぞう)’이었다. 이 영화는 일본 협동영화사가 제작한 발성(發聲)영화였지만, 광주극장은 하루 한 번 야간에 변사 연행(演行)을 수반하면서 상영하였다. 발성영화에 변사를 동원한 일은 조선인 관객을 배려한 조치로 보이지만, 하나의 이미지에 두 개의 말과 소리가 충돌하면서 발생시킬 혼란을 상상하니 흥미롭게 느껴진다.
조선인 유지가 설립한 극장이었기에 당시 개봉한 일제강점기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명우, 1935)을 상영할 법도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일본 영화를 개관 작품으로 선정한 것도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1934년 3월부터 실시된 조선총독부령에 따라서 모든 극장에서의 1편 이상 일본 영화 상영 의무화 지침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일제 지배 아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광주극장이 조선인 거리에 자리를 잡고 조선인 대상 공연을 무대에 올린 것은 조선인 공론장으로의 전환 가능성을 내포하였다. 하지만 영화 프로그램의 경우 일본인을 주된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짐작된다. 광주극장이 송죽(松竹)과 일활(日活)영화사의 작품을 상영하면서 추가로 여타 일본 영화사와 계약 체결을 희망하였기 때문이다. 1940년 극장 전무취체역(현재 상임이사역)을 맡은 설립자 최선진의 장남 최동복을 일본으로 보내 영화 시장을 답사하도록 한 일도 그러한 노력 가운데 하나였다.
광주극장이 조선인을 결집하기 위한 공간으로 기능하는 한편으로 일본의 영화산업 확대 과정에서 참여하면서 영화를 상영한 일은 아이러니하게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혼종적인 문화가 뒤섞인 일제강점기 오락장 광주극장을 방문한 일본인 배우와 조선인 극장 직원의 다정한 기념사진 촬영은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일제강점기 근대를 상징하는 영화의 상영 공간이 이질적인 존재의 결합으로 자리한 것은 낯선 일이 아니었다. 한국영화의 기원으로 정의되는 ‘의리적 구토’(김도산, 1919) 역시 장르의 혼종으로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해당 영화는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의 박승필과 신파극단 신극좌의 김도산이 함께 만들었다. 극장과 극단 대표가 제작한 바와 같이, ‘의리적 구토’는 영화와 연극이 결합한 연쇄극(連鎖劇)이었다. 연극에서 막과 막 사이에 연결되는 장면을 활동사진으로 촬영하여 무대에서 실연하기 불가능한 장면을 필름으로 연결한 공연 방식이었다. 모든 장면을 필름으로 만든 ‘월하의 맹세’(윤백남, 1923)가 한국영화의 효시가 될 수 없었던 이유로서 그것이 조선총독부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거론한다.
하지만 1903년 동대문 전기창고에서 대중에게 알려진 이래로 16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최초로 등장한 영화가 연쇄극이었던 이유는 당시 복제 기술을 이용한 이미지 생산 기반 시설과 문화 전통의 부재 때문이었다. 따라서 오랫동안 ‘감상의 시기’를 보낸 이후에야 대중문화의 장르 간 협동을 통하여 한국의 영화역사는 출발할 수 있었다. 전기의 도입과 함께 도래한 영화를 관람한 혼종의 공간 극장의 불빛은 그렇게 아른거리기 시작하였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위경혜=영상예술학 박사이자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이다. 극장을 중심으로 문화 수용의 지역성에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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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광주극장 |
영화사 목록에서 알 수 있듯이 제국관은 일본인을 우선 고려한 종족(ethnic) 차별적인 공간이었지만 관공서 근무자와 같은 일본어 해독 능력이 있는 조선인들도 입장 가능하였다. 경성과 비교하여 광주의 영화 소비 시장이 상대적으로 작았기 때문에 일본인에 한정한 극장 운영은 수지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제국관이 일본인과 조선인을 섞은 혼종(混種)의 공간이었던 사실은 극장 프로그램에 조선영화의 흥행작을 포함하였기 때문이다. 1930년 3월 26일 저녁 8시 700여 명의 관중이 ‘아리랑 후편’(이구영, 1930)을 관람하던 도중 이웃집에서 발생한 화재를 영사실 화재로 오인하면서 관객들이 대피한 사건이 ‘중외일보’를 통해 알려졌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최대 흥행작 ‘아리랑’(나운규, 1926)의 후속편이자 당대 최고 스타 나운규가 출연한 영화를 일본인 극장에서 상영한 것은 종족의 혼재를 보여준 지역 도시 극장의 모습이었다.
조선인에 의해 조선인 중심지 충장로 5가에서 문을 연 광주극장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다. 1935년 10월 10일 광주극장의 개관 기념 작품은 ‘일상월상(日像月像, じつぞうげつぞう)’이었다. 이 영화는 일본 협동영화사가 제작한 발성(發聲)영화였지만, 광주극장은 하루 한 번 야간에 변사 연행(演行)을 수반하면서 상영하였다. 발성영화에 변사를 동원한 일은 조선인 관객을 배려한 조치로 보이지만, 하나의 이미지에 두 개의 말과 소리가 충돌하면서 발생시킬 혼란을 상상하니 흥미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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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났다는 소리에 관객 소동이 발생한 제국관에 관한 신문기사. 중외일보, 1930년 3월 30일 석간 2면. |
광주극장이 조선인 거리에 자리를 잡고 조선인 대상 공연을 무대에 올린 것은 조선인 공론장으로의 전환 가능성을 내포하였다. 하지만 영화 프로그램의 경우 일본인을 주된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짐작된다. 광주극장이 송죽(松竹)과 일활(日活)영화사의 작품을 상영하면서 추가로 여타 일본 영화사와 계약 체결을 희망하였기 때문이다. 1940년 극장 전무취체역(현재 상임이사역)을 맡은 설립자 최선진의 장남 최동복을 일본으로 보내 영화 시장을 답사하도록 한 일도 그러한 노력 가운데 하나였다.
광주극장이 조선인을 결집하기 위한 공간으로 기능하는 한편으로 일본의 영화산업 확대 과정에서 참여하면서 영화를 상영한 일은 아이러니하게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혼종적인 문화가 뒤섞인 일제강점기 오락장 광주극장을 방문한 일본인 배우와 조선인 극장 직원의 다정한 기념사진 촬영은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일제강점기 근대를 상징하는 영화의 상영 공간이 이질적인 존재의 결합으로 자리한 것은 낯선 일이 아니었다. 한국영화의 기원으로 정의되는 ‘의리적 구토’(김도산, 1919) 역시 장르의 혼종으로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해당 영화는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의 박승필과 신파극단 신극좌의 김도산이 함께 만들었다. 극장과 극단 대표가 제작한 바와 같이, ‘의리적 구토’는 영화와 연극이 결합한 연쇄극(連鎖劇)이었다. 연극에서 막과 막 사이에 연결되는 장면을 활동사진으로 촬영하여 무대에서 실연하기 불가능한 장면을 필름으로 연결한 공연 방식이었다. 모든 장면을 필름으로 만든 ‘월하의 맹세’(윤백남, 1923)가 한국영화의 효시가 될 수 없었던 이유로서 그것이 조선총독부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거론한다.
하지만 1903년 동대문 전기창고에서 대중에게 알려진 이래로 16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최초로 등장한 영화가 연쇄극이었던 이유는 당시 복제 기술을 이용한 이미지 생산 기반 시설과 문화 전통의 부재 때문이었다. 따라서 오랫동안 ‘감상의 시기’를 보낸 이후에야 대중문화의 장르 간 협동을 통하여 한국의 영화역사는 출발할 수 있었다. 전기의 도입과 함께 도래한 영화를 관람한 혼종의 공간 극장의 불빛은 그렇게 아른거리기 시작하였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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