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택시를 탄다. 택시가 신호를 무시하고 과속으로 달릴 때마다 뒤에서 숨을 죽이고 앉아 있다. 시간이 돈인지라 그러겠거니 하고 짐작했다. 한번은 심각하게 물어봤다. 신호를 지키면서 좀 천천히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될 수 있으면 천천히 안전하게 가주시라고 말했다. 안전이 최우선인 나에게는 자칫하면 목숨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위험이 영 불편했다.

그런데 답변이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신호를 지키고 정상속도로 운전하면 승객들이 불만을 표시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느리게 가려면 왜 택시를 타냐고. 심지어 승객이 먼저 택시기사에게 신호도 위반하고 과속해서 빨리 가달라고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안전하게 운전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느냐’면서 직업적인 어려움을 토로하는 택시기사가 그날따라 처연하게 느껴졌다. 신호 지키면서 천천히 가달라고 말해주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불법을 권유하는 사회, 이것이 부정하기 어려운 우리 사회의 슬픈 단면이다. 그래서 법을 지키는 것이 도리어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우리 사회에서 법관이 갖는 직업적 특권이 있다. 법관은 법을 지키고 정직해야 한다고 누구에게나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법관이기 때문이다. 인격이 그리 고매하지 않고 생활도 그다지 고결하지 못한 법관이라고 해도, 분쟁 당사자들에게는 양보하고 희생하라고 권유할 수 있다. 법정에서는 양보와 희생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치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어릴 때 아버지께서는 “조금 손해 보고 살면 삶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왜 손해 보는 것이 행복일까? 그런데 지금은 양보하고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원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법정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자주 인용한다. 조금 손해 보고, 대신 행복을 사라고……. 그러면 뜻밖에도 이 말을 쉽게 수긍하는 당사자들이 많다. 그래서 치열했던 분쟁이 예상외로 쉽게 해결되기도 한다.

저잣거리에서 범부가 이야기한다면 세상 물정 모르는 숙맥이라고 치부되기 쉬운 말도 법복을 입은 법관의 입에서 나오면 고결한 권면이 될 수 있다. 왜 그럴까? 곰곰이 그 이유를 생각해 본다. 우리 모두는 정의롭고 공평한 세상을 원한다. 법이 지배하고 평화로운 사회, 개인의 권리와 사회 전체의 복리가 균형 잡힌 그런 사회를 원한다. 이러한 바람만큼이나 법을 해석하고 선언하는 법관은 정직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주기를 사람들은 바라는 것 같다. 우리 사회가 원하는 법관은 삶의 셈법에 능통한 그런 사람이 아니다. 우직하리만큼 정직하고 법에 대하여 순수한 마음을 가진 그런 사람일 것이다. 이제 법관은 자신이 말한 그 말에 구속되어 바르고 올곧은 삶을 향하여 고뇌하게 된다. 정직하라는 양심의 소리에 예민하게 되어야 한다. 쉽지 않은 길이다.

그래서 누구나 할 수 없는 바른 말을 근엄하게 말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오래되어 낡은 법복이 차츰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볍게 걸칠 수 있었던 그 옷이 이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를 지니게 되었다. 이 무게는 국민의 기대와 소망을 담고 있기 때문이리라.

다음주에 선배 법관 한 분이 정년을 맞으신다. 바른 생각과 올곧은 삶을 위하여 바쳐 온 세월의 향기가 느껴진다. 머리는 하얗게 세었고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잡혔다. 낡은 법복의 무게를 감당하려는 고뇌도 깊었으리라. 환한 미소 너머로 느껴지는 쓸쓸함도 낯설지는 않다. 오랜 세월, 법복의 무게를 감당한 그분이 존경스럽다.

〈조영호 광주지방법원 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