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수정’이라는 영화를 아시는지요. 한 여자와 두 남자 사이의 묘한 관계를 그린 홍상수 감독의 작품으로, 지금은 고인이 된 이은주씨가 출연한 작품으로도 유명합니다. 처녀인 한 여자, 그녀와 연인관계에 있는 한 남자 그리고 그 남자를 통해 한 여자를 소개받은 또 다른 남자, 이들 3명의 삼각관계에 관한 묘사가 이 작품의 큰 줄기인데, 이 작품은 한 여자와 두 남자가 동일한 상황에 관하여 서로 다른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어쩌면 감독은 ‘사람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판사입니다. 운 좋게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판사로 임용도 되어 여러 재판을 담당하여 왔습니다. 판사는 말 그대로 판단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판단하여야 할 대상의 거의 대부분은 과거에 있었던 것이고, 대립되는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판단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과거 기억이 드러나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드러난 과거 기억들이 서로 모순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가 담당했던 업무 중에서 사람들의 기억에 상당 부분 의존하여야 하고 또 서로 모순되는 기억들이 대립하는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이혼재판이었습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이기에 과거의 일에 대해 기억만 있을 뿐 속칭 물증이라는 것이 거의 없고, ‘갈라서면 남’이기에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기억하여 주장하게 됩니다. 다른 재판에서도 다양한 이유로 서로 모순되는 기억들이 대립하게 됩니다.

모순되는 기억들 속에서 진실을 찾아야 하는 것이 바로 판사의 임무입니다. 하지만 판사들도 사람이기에 왜곡된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듯 불완전한 사람이 불완전한 기억들 속에서 진실을 찾아야 하고, 또 재판의 특성상 이긴 사람과 진 사람이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는 판단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얼마 전 정년퇴임하신 선배 판사님께서 하신 ‘재판 당사자들 중 현명한 재판이었다고 칭찬할 사람은 50%도 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말씀도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저는 재판을 진행하면서 상대방을 비난하는 당사자들에게 ‘당신들이 말하고 있는 과거는 숟가락과 비슷하다. 원고는 숟가락의 오목한 부분만을 이야기하고 있고, 피고는 그 반대편인 볼록한 부분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오목한 부분과 볼록한 부분 모두 숟가락의 일부이고, 오목한 부분을 보든 볼록한 부분을 보든 어느 경우나 모두 얼굴이 틀어져 보인다’라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판사로서 계속 생활해 가면서 ‘오목한 부분과 볼록한 부분 모두 숟가락의 일부라는 점은 명백한데, 오히려 나 자신이 오목한 부분과 볼록한 부분 모두 사물을 왜곡되게 보여준다는 점에만 몰입한 채 숟가락 전체를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고민도 하게 되었습니다.

저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판사들도 이러한 어려움과 고민 속에서 현명한 판단을 하기 위해 온 정신을 쓰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현명한 판단들이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 판사들을 향해 ‘오(Oh)’라는 감탄사가 끊이지 않는 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도 해 봅니다.

모순되는 기억들 속에서 진실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숟가락 전체를 보지 못할까봐 남모를 고민을 하며, 50%의 지지도 받지 못하지만 100%의 지지를 꿈꾸며 열심히 일하고 있는 전국 법원의 모든 판사님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최철민 광주지방법원 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