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검사다’ 몇 년 전 한 케이블방송에서 방영했던 미국드라마의 제목이다. 드라마의 주인공인 애나베스는 갓 태어난 아기, 남편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검사 일까지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소위 ‘슈퍼맘’이다. 드라마 자체의 재미도 쏠쏠했을 뿐만 아니라 정의를 위해서라면 언론의 강압이나 정치권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담당한 사건의 대부분을 승소로 이끌어내는 탁월한 재능의 소유자인 주인공을 보면서 여검사 애나베스의 용기와 열정을 흡입하곤 했다.

필자가 검사로 재직하면서 종종 받게 되는 질문은 “여자가 검사를 하면 힘들지 않나요?”라는 질문이다. 영화에서처럼 검사가 직접 범인을 추격하거나 처절한 격투 끝에 범인을 체포하는 것은 영화적 재미를 위해 설정된 것일 뿐 실제 업무 수행과정에서 발생하는 상황은 아니다. 대신 실제 검사 업무의 대부분은 산적한 사건 기록과 씨름하는 것, 그리고 범행을 감추기 위해 철저히 준비를 한 범인들과 마주하고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이루어지는 조사과정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신체적 조건이 아니라 사건의 숨겨진 실체와 진실을 파악하고 정의를 찾아내려는 용기와 열정이다.

오히려 필자는 여검사여서 실체적 진실발견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과거 법원집행관 사무원이 부동산 경매과정에서 경매브로커와 입찰자들에게 입찰정보를 제공하고 돈을 주고받은 사건이 있었다. 경매브로커인 피고인은 수사과정에서는 범행을 자백하였으나, 법정에서 피고인 변호인은 “검찰에서 강압 수사를 하여 피고인이 허위 자백을 하였다”며 이를 뒤집었다. 피고인을 수사했던 필자는 법정에서 피고인에게 “제가 조사할 때 어떤 강압행위를 하였다는 것인가요?”라고 따져 물었고, 피고인은 이에 대해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했다(물론 이는 필자의 주관적인 평가이다). 작은 체구의 여검사와 이와 대비되게 건장한 피고인이 조사과정에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독자들도 당시 상황이 이해될 것이다. 결국 여검사와 피고인의 대화를 참작한 재판부는 피고인에게 중형을 선고한 바 있다.

길지 않은 5년여의 검사생활 중 때로는 평범한 사건 속에 숨겨져 있던 비리행위의 단서를 찾아내 처벌함으로써 애나베스 검사처럼 뿌듯했던 기억들도 있고, 때로는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 앞에 고민만 앞서다가 선배, 동료 검사, 수사관들의 경험과 노하우를 활용해 사건을 해결했던 기억도 있다. 사건의 실체를 파헤쳐가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일에 몰두할 때도 있었지만, 끝이 없이 밀려드는 사건 앞에서 의기소침해지기도 했고, 크고 작은 실수를 하면서 한없이 자책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지탱할 수 있었던 힘은 항상 옆에 있어준 동료, 그리고 검사로 임관하면서부터 가슴에 품었던 ‘실체적 진실 발견’으로 정의를 구현한다는 검찰의 변하지 않는 소임이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모든 큰 일은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크게 어려운 일은 가장 쉬운 것에서부터 풀어야 한다”고 했다. 최근 검찰과 관련한 일련의 사건 속에서 법을 집행하는 공직자로서 국민의 신뢰를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를 깨닫고 있다. 그러나 결국 국민의 신망을 받는 검찰이 되는 방법은 무모함이 아닌 용기, 거만함이 아닌 열정과 끈기를 가지고 사건 하나하나의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려고 노력하는 기나긴 길 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 길 위에서 필자는 비록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화려하지는 않겠지만, 애나베스 같은 여검사를 꿈꾼다. 나는 여검사다.

〈정희선 광주지검 공안부 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