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법정에 나와야 합니까?”, “판사님, 빨리 판결해 주세요.”, “판사님이 어떻게 결론 내려주시든 저는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필자가 민사 소액재판 업무를 담당했던 때 당사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지금은 담당하는 사건의 액수가 조금 커져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법정에서 많이 듣는 얘기 중 하나이다.

어느 통신 회사의 광고 카피처럼 한국 사람들은 성미가 급해서일까? 아니면 어느 소설가의 날카로운 풍자처럼 판사는 사건을 늘여 조지기 때문일까? 물론 ‘돈 많이 들고 오래 끄는’ 민사소송이 되지 않도록 신속하게 재판을 해야겠지만, 무작정 빨리 끝내기에는 판결의 효력이 가볍지는 않은 것 같다.

얼마 전 금융기관이 대출금을 청구한 사건에서 피고가 낸 탄원서와 유사한 답변서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금융기관이 9년 전에 승소한 판결의 시효를 연장하기 위해서 다시 소를 제기한 사건이었는데, 이전 재판에서는 피고가 답변서를 제출하지 않아 변론 없이 원고 승소 판결이 선고된 바 있다. 그런데 이번 재판에서 피고는 필자에게 뜻밖에도 볼펜으로 자신의 사연이 담긴 답변서가 제출해 긴장하면서 기록을 검토하게 됐다.

피고는 자신이 차량 할부금을 내기 위해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을 받은 적이 없고, 선배가 자신의 인적 사항을 도용해서 대출 약정을 체결했다고 하소연했다. 이전 사건에서 소장을 받고 선배에게 항의하니 선배가 미안하다고 하면서 문제를 조만간 해결해 준다고 해서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패소 판결을 받게 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명 뒤에는 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한 호소와 과거에 대한 후회가 이어졌다.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데, 금융기관이 이전 판결로 월급을 압류해 형편이 더욱 어려워졌다고 썼다. 그는 이전에 패소 판결을 받았을 때는 대학교 재학 시절로 별다른 재산도 없고 해서 판결이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이렇게 괴롭힐 줄 알았다면 이전에 제대로 소송을 했었어야했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후회로 답변서를 마무리했다.

사실 필자는 피고가 낸 답변서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피고의 주장이 사실이더라도 법원은 피고의 주장을 인정해서 이전과는 다른 판결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법을 공부한 사람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이전 판결로 금융기관이 피고에 대해 대여금 채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확정됐기 때문에, 이제 자신의 인적 사항이 도용됐다는 피고의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피고도 확정된 판결의 효력을 뒤집기 힘들다는 법률상담을 받았던 것일까? 법정에서 피고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었지만 피고는 변론 기일에 출석하지 않았고, 결국 이번 사건에서도 다시 원고 승소 판결이 선고됐다.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판결이 효력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됐고, 필자는 소송당사자들에게 법률상담을 받아보고 서면이나 자료를 더 내보라고 하는 등 이전보다 더 신중하게 재판에 임하게 됐다.

하지만 사람들은 신중한 재판보다는 신속한 재판을 더 원하는 것 같다. 당사자들은 판사가 자료 제출을 촉구하면서 변론을 속행하면 대부분 못마땅한 표정으로 법정을 나선다. 승소에 자신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재판부가 이유 없이 판결을 미루는 걸까? 사람들은 판결이 확정되면 엎질러진 물처럼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매주 법정에서 신속한 재판을 해야 하는 사건인지 아니면 신중한 재판을 해야 하는 사건인지 고민을 한다.

〈광주지법 민사 11단독 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