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몇 년 전 한 도시에서 근무하던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민원 담당 직원이 난처한 기색으로 “검사님, 어제부터 한 여성이 검사님을 꼭 뵈어야 한다고 합니다.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악성민원인 같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사건검색 출력물을 몇 장을 건넸다. 그 여성은 이미 다른 지역 검찰청에 누군가가 자신을 도청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수차례 진정을 냈으나 해당 검찰청은 구체적인 단서가 없어 진정을 모두 자체 종결했다는 내용이었다.

잠시 후 서른 살 전후의 젊은 여자가 검사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제가 계속 도청을 당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청와대, 국정원이 다 연결돼 있는 큰 사건이에요.”라면서 말을 시작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불안한 듯 계속 움직였다. 필자는 사건출력물을 보면서 “그런데 이 사건은 이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관할이 아니어서 수사가 불가능합니다. 관할 검찰청으로…”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녀가 말을 가로막았다. “그쪽에서는 제 이야기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아요. 그리고 여기서도 도청이 되고 있단 말이에요.”라고 강하게 말했다.

어차피 필자의 설명에 이해할 것 같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일단 그녀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기로 했다. 그녀는 5∼6년 전부터 누군가로부터 계속 도청을 당하고 감시당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원래 살던 고향에서 견디지 못해서 얼마 전 전혀 연고도 없는 이 도시까지 도망치듯 이사했는데 여기서도 같은 일이 반복된다고 했다. 불안해하는 그녀의 눈을 보니 진짜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해야 그녀를 납득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불현듯 그즈음 유행하던 도청탐지기 관련 뉴스가 생각났다.

필자는 그녀에게 한 가지를 제안했다. “불안해하시는 것은 알겠는데 도청당하고 있다는 느낌만으로는 수사를 시작할 수 없어요. 수사 자체도 일정 부분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니까요. 일단 의심스러우면 먼저 확인을 해 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용산전자상가에 가면 도청탐지기라는 것이 있다던데 그것으로 도청이 되고 있다는 증거가 나오면 그때 저에게 바로 알려주세요. 그러면 수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이 말을 받아들일지 걱정했는데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환해지더니 의외로 쉽게 수긍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근무하는 2년 동안 그녀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필자의 이야기를 들은 다른 선배가 알아보니 그녀는 원래 살던 지역 검찰청에 수많은 진정을 하고, 검찰청에 자주 드나들면서 직원들조차 그녀의 이사 소식을 알 정도였다.

필자가 그녀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고 수사를 할 수 없다거나 그것만으로는 범죄가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면 어땠을까. 이 사건 직후에는 필자도 마음을 다잡고 “어떤 사람이든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줘야겠다”, “내 생각에 상대방의 말이 옳지 않다거나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되더라도 일단 듣고 공감해줘야겠다”라고 다짐했다. 물론 워낙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들과 매일 맞대다 보면 매번 그 같은 마음가짐 그대로 행동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핑계 같지만 여전히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다가 중간에 끊고 쟁점정리를 하곤 한다.

생각해 보면,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고 공감하는 능력은 민원 관련 업무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요즘 쏟아져 나오는 생활지침서들에는 공감능력을 키우라고 하고, 텔레비전의 모 아침 프로그램에서는 가족들의 말에 무조건 “그렇구나”라고 대응해주면 싸울 일이 없게 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묘하게도 말을 그렇게 하다 보면 실제로 자연스레 상대방의 감정이나 생각도 조금씩 공감이 되고 이해되기도 한다. 상대방의 감정이나 생각을 존중해 주는 방식으로 대화를 하고, 의사소통이 되기 시작하면 세상의 다툼이 조금 줄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를 해 본다. 오늘부터 가장 가까운 가족, 동료, 친구부터 먼저 시작해 보자.

〈광주지방검찰청 형사2부 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