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2012년 09월 03일(월) 00:00 가가
조 영 희
여름의 끝머리를 장식하듯 굵직한 두 개의 태풍이 갓 지나갔다. 미리 대처를 잘한 탓에 예상보다 피해가 크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광풍과 수마가 휩쓸고 간 자리에서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본 수많은 사람들은 올해 연달아 찾아온 태풍의 기억이 쉽게 지워지지 않을 듯하다.
법복을 입고 검사 선서를 한 것이 얼마 전 같은데 어느새 7번째의 여름이 또 지나가고 있다.
그동안 검찰청 이런저런 부서에서 다양한 사건과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지내다가 이번에는 공판부에 오게 됐다. 참고로 평검사들은 2년마다 전국 각지로 임지를 옮겨다니고, 한 임지에서는 형사부, 공판부, 특수부 같은 부서에서 반년 내지 1년 동안 일하다가 다른 부서로 옮기곤 한다. 공판부는 동료 검사들이 수사해 법원에 기소하는 사건들을 맡아 법정에서 소송활동을 수행하는 부서다.
필자가 들어가는 법정 중에는 성폭력전담 재판부가 속해 있는데, 그런 까닭에 요새 천태만상의 다양한 성폭력 사건들을 접하고 있다. 상상을 뛰어넘는 온갖 반인륜적, 변태적, 가학적 성폭력의 홍수이다. 그 중 상당수는 면식범의 소행이다. 지인과의 술자리, 이웃 간 관계 속에 친분을 가장한 성폭력이 스며있다.
성폭력 사건을 수사하거나 공판을 맡아 진행하다 보면 그러한 피고인들이 단골로 주장하는 내용이 있는데 바로 “친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혹은 “피해자가 별다른 반응을 안 보여서 해도 괜찮은 것으로 생각했어요” 등이다. 곧이어 피해자를 향한 변호인의 집요한 반격이 이어진다. “같이 그 시간에 술 마신 것 보면 서로 호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왜 바로 뛰쳐나오지 않았죠?” 서로 좋아서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니냐는 취지다.
피고인이 때리거나 특별히 협박을 하지도 않았다면 결국 피해자는 피해를 당한 상황임에도 스스로 왜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 왜 좀 더 격렬하게 저항하지 못했는지를 적극적으로 해명해야 하는 난감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당황해서 말 몇 마디라도 잘못하게 되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통째로 흔들린다. 법정에 앉아있는, 그들 중 다수가 남성인 재판 관계자들의 눈이 매섭다. 피해자는 한숨을 쉬고 계속 무언가 자신의 입장을 호소해보지만, ‘왜’, ‘어떻게’라는 질문들만 계속된다.
피해자의 눈빛이 흔들린다. 피해자 진술 속에 허점을 찾아내고자 하는 눈빛도 함께 부지런히 움직인다. 긴 신문을 마치고 피해자는 허탈한 뒷모습을 보이며 법정을 나선다. 그들은 그 순간 어떤 마음일까.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그리고 자신의 속을 내보일 수 없는 상황에 좌절하며 다시금 상처를 안으로 삭히게 되진 않을까.
여러 가지 이유로 묻혀버린 성폭력 범죄가 과거보다 많이 줄었다고 한다. 각종 매체의 영향과 여성들의 자의식의 성장 탓이리라. 그럼에도 성폭력 피해자들은 여전히 이중의 피해를 감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성폭력 자체의 피해와 수사기관이나 재판과정에서의 노출 혹은 주변인들의 편견에 의한 피해, 이중의 고통인 셈이다.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나와 다른 세상의 일로, 내 가족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자. 한번쯤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환절기 감기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듯 불행한 사건사고가 어느 날 갑자기 나와 내 가족의 일이 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그럼에도 피해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접한 사건들을 토대로 나름의 주의사항을 생각해 보면, ‘밤늦은 시간에 인적이 뜸한 길을 혼자 걷지 않을 것’, ‘특히 술 취한 상태를 조심할 것’, ‘부득이 혼자 가야할 때는 전화통화를 하면서 갈 것’, ‘지하주차장 등에서는 차에 타고 내리기 전에 주변을 살필 것’, ‘집에 들어가려 할 때 뒤따라오는 움직임이 없는지 주의할 것’, ‘집에 들어와서는 전체 출입문을 꼭 잠글 것, 특히 화장실 작은 창문도 조심’.
그리고 혹시라도 불의의 피해를 당하게 된 상황이라면 ‘거부의사를 분명히 나타낼 것’, ‘저항할 수 있다면 저항할 것’, ‘피해 상태 그대로 피해 사실을 신속히 신고할 것’, ‘심리치료를 받을 것’, ‘자책하지 말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래도 세상은 불의보다는 정의가 앞서고 나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믿을 것’ 등이다.
태풍의 수마가 할퀴고 간 상처처럼 피해자들의 마음속에 난 이중, 삼중의 상처가 쉬이 아물지 않겠지만, 시간은 흘러간다. 그 또한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다. 따사로운 가을볕이 스미듯이 행복이 다시금 찾아올 것을 믿자. 그리고 그때까지 그들을 감싸주자.
〈광주지검 공판부 검사〉
법복을 입고 검사 선서를 한 것이 얼마 전 같은데 어느새 7번째의 여름이 또 지나가고 있다.
필자가 들어가는 법정 중에는 성폭력전담 재판부가 속해 있는데, 그런 까닭에 요새 천태만상의 다양한 성폭력 사건들을 접하고 있다. 상상을 뛰어넘는 온갖 반인륜적, 변태적, 가학적 성폭력의 홍수이다. 그 중 상당수는 면식범의 소행이다. 지인과의 술자리, 이웃 간 관계 속에 친분을 가장한 성폭력이 스며있다.
당황해서 말 몇 마디라도 잘못하게 되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통째로 흔들린다. 법정에 앉아있는, 그들 중 다수가 남성인 재판 관계자들의 눈이 매섭다. 피해자는 한숨을 쉬고 계속 무언가 자신의 입장을 호소해보지만, ‘왜’, ‘어떻게’라는 질문들만 계속된다.
피해자의 눈빛이 흔들린다. 피해자 진술 속에 허점을 찾아내고자 하는 눈빛도 함께 부지런히 움직인다. 긴 신문을 마치고 피해자는 허탈한 뒷모습을 보이며 법정을 나선다. 그들은 그 순간 어떤 마음일까.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그리고 자신의 속을 내보일 수 없는 상황에 좌절하며 다시금 상처를 안으로 삭히게 되진 않을까.
여러 가지 이유로 묻혀버린 성폭력 범죄가 과거보다 많이 줄었다고 한다. 각종 매체의 영향과 여성들의 자의식의 성장 탓이리라. 그럼에도 성폭력 피해자들은 여전히 이중의 피해를 감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성폭력 자체의 피해와 수사기관이나 재판과정에서의 노출 혹은 주변인들의 편견에 의한 피해, 이중의 고통인 셈이다.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나와 다른 세상의 일로, 내 가족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자. 한번쯤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환절기 감기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듯 불행한 사건사고가 어느 날 갑자기 나와 내 가족의 일이 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그럼에도 피해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접한 사건들을 토대로 나름의 주의사항을 생각해 보면, ‘밤늦은 시간에 인적이 뜸한 길을 혼자 걷지 않을 것’, ‘특히 술 취한 상태를 조심할 것’, ‘부득이 혼자 가야할 때는 전화통화를 하면서 갈 것’, ‘지하주차장 등에서는 차에 타고 내리기 전에 주변을 살필 것’, ‘집에 들어가려 할 때 뒤따라오는 움직임이 없는지 주의할 것’, ‘집에 들어와서는 전체 출입문을 꼭 잠글 것, 특히 화장실 작은 창문도 조심’.
그리고 혹시라도 불의의 피해를 당하게 된 상황이라면 ‘거부의사를 분명히 나타낼 것’, ‘저항할 수 있다면 저항할 것’, ‘피해 상태 그대로 피해 사실을 신속히 신고할 것’, ‘심리치료를 받을 것’, ‘자책하지 말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래도 세상은 불의보다는 정의가 앞서고 나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믿을 것’ 등이다.
태풍의 수마가 할퀴고 간 상처처럼 피해자들의 마음속에 난 이중, 삼중의 상처가 쉬이 아물지 않겠지만, 시간은 흘러간다. 그 또한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다. 따사로운 가을볕이 스미듯이 행복이 다시금 찾아올 것을 믿자. 그리고 그때까지 그들을 감싸주자.
〈광주지검 공판부 검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