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세 살의 선생은 고령이 무색할 정도로 에너지가 넘쳤다. 그리고 어찌나 달변이던지 막힘이 없었다. 잠시도 쉬지않고 말을 이어가는 바람에 수첩에 받아적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날 기자는 ‘원활한’ 인터뷰를 위해 선생의 말을 중간에 ‘끊는’ 무례를 범해야 했다).

게다가 1시간 30분의 인터뷰가 끝나자 엘리베이터 앞까지 기자일행을 배웅하는 등 친절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인터뷰 기사가 실린 신문을 잘 받았다는 전화를 직접 걸어와 기자를 또 한번 감동시켰다.

지난 2006년 4월, 광주일보 창사 54주년 기념 특별대담으로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80)을 만났을 때의 일화다. 권위와 격식을 내세우지 않았던 소탈한 모습이 엊그제 일 마냥 지금도 생생하다. 늘 시대를 앞서가는 그의 혜안은 이날 인터뷰에서도 빛을 발했다. 아시아 문화중심도시를 준비하는 광주에게 선생은 인프라도 중요하지만 도시의 미의식과 문화수준을 높이는 게 먼저라고 조언했다.

‘영원한 청년’일 것 같은 이어령 전 장관이 최근 팔순을 맞았다. 그런데 신간 ‘생명이 자본이다’의 출판기념회를 겸해 열린 그의 팔순잔치는 여느 유명인사들의 화려한 ‘팔순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으레 팔순잔치에 빠지지 않는 화환이나 얼음조각, 그리고 축의금과 같은 겉치레를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나와 동행한 분들인데 누구만 VIP라고 소개할 수 없다”는 선생의 뜻에 따라 내빈소개와 축사도 없었다고 한다. 이름하여 ‘5무(無)잔치’. 대신에 시낭송, 사물놀이, 패션쇼, 현대무용 등 문화 향기가 가득한 축제로 치러졌다.

매스컴을 통해 이 전 장관의 팔순잔치 기사를 접하면서 기자는 역시 ‘선생답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문득 얼마 전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재일교포 하정웅의 ‘나눔의 미학전’(11월22∼내년 2월9일) 개막식이 오버랩됐다. 지역 인사와 청년작가 100여 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서는 내빈소개와 축사가 30분 넘게 이어졌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사회자는 행사 중간 중간에 소개를 빠뜨린 ‘귀빈’들을 챙기느라 바빴다. 행사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것은 물론이다.

사실 어디 전시회뿐이던가. 광주에서 열리는 대부분의 문화행사와 축제의 개막식에는 시장이나 기관장의 인사말, 축사, 내빈소개 등이 빠지지 않는다. 가장 ‘문화적’이어야 할 이들 행사가 형식과 겉치레 일색의 의식(儀式)으로 치러지는 것이다. 개막식 자체만 보면 광복절 행사인지 브랜드 공연 페스티벌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다.

부디 다가오는 갑오년 새해에는 이런 ‘거품’들이 지역문화계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7년 전 이 전 장관이 광주에게 조언했던 도시의 문화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편집부국장·문화선임기자〉